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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처 '국적 불명 한복' 개선할 것"전통 옷차림과는 다른 형형색색의 '퓨전 한복'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는 가운데 문화재청이 궁궐 일대의 한복 문화부터 개선하기로 했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가치를 대표해온 전통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여러 기관·단체와 협업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국가유산청 출범을 앞두고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최 청장은 "국가유산청이 앞장서서 우리 고유의 한복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고 개선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복을 입고 향유하는 문화인 '한복생활'은 현재 국가무형문화재(국가무형유산)로 지정돼 있다. 한복은 바지와 저고리 혹은 치마와 저고리로 구성되며 옷고름이 있다. 오랜 역사를 갖고 전승돼 왔으며 오늘날에도 명절이나 각종 의례에서 예를 갖춰 입는 우리 문화 그 자체인 셈이다. 최 청장은 "경복궁을 찾는 많은 관광객이 한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지만, 실제 한복 구조와 맞지 않거나 '국적 불명'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왕이 입는 곤룡포 위에 갓을 쓰거나, 여성 옷의 위·아래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최 청장은 "경복궁 주변 한복점의 현황을 조사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협의체를 구성할 계획"이라며 "각 업체에서 한복을 바꾸는 시점에 맞춰 검증된 복식을 제시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복 착용자의 고궁 무료 관람 조건도 검토할 계획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최 청장은 "강제적인 '채찍'보다는 업계가 원하는 부분을 반영해서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본다"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두면 우리 한복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문화재청은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청과 업무협약(MOU)을 맺기도 했다. 최 청장은 "우수한 한복 대여업체를 지원·양성하고 '궁중문화축전', 종로구 '한복 축제' 등을 통해 전통 한복의 고유성이 유지되도록 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 청장은 지난해 말 국민의 분노를 산 경복궁 '낙서 테러' 사건과 관련해서는 "정말 화가 나서 분을 못 참을 정도"였다며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빠르게 나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연일 대책 회의를 하며 국가유산 주변 상황을 선제적으로 점검하고 개선책을 낼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재료비, 물품 임대료, 인건비 등 1억원 넘게 쓰인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문화재청은 최종 비용을 산정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 청장은 "지금까지 들어간 인건비, 재료비 등을 토대로 최종 비용을 정리하고 있다"며 "재판 상황을 고려해 (최근 징역형이 구형된) 모방범에 대해 먼저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 청장은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고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으로 선출된 점을 언급하며 "국경 없는 '문화의 전쟁'이 펼쳐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세계유산위원회 사무국의 제안을 받아 이르면 2026년에 한국에서 위원회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1977년 처음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이래 한국에서 개최된 적은 없다. 이처럼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문화재청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지난 62년간 이어온 문화재 용어와 분류 체계가 오는 17일부터 전면적으로 바뀔 예정이다. 문화재청 역시 국가유산청이라는 이름을 새로 달고 첫발을 내디딘다. 최 청장은 "문화재청이 과거의 역사를 보존하고 복원해 후대에 전하는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국가유산으로 미래가치를 창출하고 국가와 지역 발전의 동력이 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초부터 최 청장은 오른쪽 가슴에 국가유산을 알리는 배지를 착용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인 궁궐,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인 산지 지형, 공동체의 오랜 관습과 정신이 전승되는 과정을 형상화한 사람 문양이 그려진 배지다. 최 청장은 "만나는 사람마다 배지를 보고는 궁금해한다. '국가유산이 무엇이냐', '언제 달라지냐' 이렇게 물어보는 분도 많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홍보한다"며 웃었다. 그는 "문화재라 하면 필연적으로 역사와 연결되기 때문에 '과거 보존'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과거 지향', '지역 개발 걸림돌'이라는 이미지가 따라와 늘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이제는 그런 오명을 벗고 지역사회의 원천 자원이자 원동력이 되겠다"며 "5월 17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국가유산의 미래 비전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평소 '서 있으면 땅이지만, 걷기 시작하면 길이 된다'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합니다. 저를 포함해 우리 청 식구들 모두 국가유산과 국가유산청의 길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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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나요당농요상 수상, (사)국가무형문화재 통명농요보존회 안성배 전승교육사지난 12일에 나요당 농요상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제1회나요당농요상'은 경북 예천 (사)국가무형문화재 통명농요보존회 안성배(安成培) 전승교육사가 수상했다. 안성배(1973년 통명 출생)씨는 2020년부터 통명농요보존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농요의 현장과 이론을 겸비하고 있다. 2016년 중앙대학교대학원 국악교육학 석사과정 졸업, 2019년 안동대 민속학과 박사과정(지도교수 한양명)을 수료했다. 안성배 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선배님 어른들 제치고 이런 큰상을 주셔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큰 책임을 맡기신 것 같다. 농요의 현장과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매진해왔다. 더욱 통명농요를 보존 및 계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이어 "준비하고 있는 안동대 박사학위 주제도 무형유산 '통명농요' 전승활성화에 관한 것이라고 전했다. "10여년 동안 통명농요 전승계보 및 회원 등 보존회 전승활동 아카이브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다행히 150여 분 회원들의 자취를 발굴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잠시 단절된 민속예술이 명백을 이어오다가, 마을제에서 활발하게 계승되었던 민속예술이나 민속연희가 이제는 마을 인구가 줄어들면서 걱정이 앞선다. 광산이 산재해 있는 있는 주변 지역과 다르게 예천은 농업이 주를 이루면서 하늘을 섬기며 마을과 전통을 지켜왔다. 그래서 통명농요 '아부레이수나' 같이 아름다운 노래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고 덧부쳤다. 예천 순흥 안씨 집성촌에서 자라난 안성배씨는 자연스럽게 통명농요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당숙어른, 사장어른 등이 모두 통명농요보존회 단원이다. 1991년부터 대학 동아리에서 풍물활동을 하다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통명농요와 통명농악를 접하고, 아버지가 작고후 보존회에 들어와서 자리를 메꾸웠다. 통명농악 상쇠어른(윤석원, 1937-2008)이 작고 후, 2009년 제50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경북대표(상쇠)로 출전, 현재 통명농악 상쇠를 맡고 있다. 마을 동아리 단원들을 지도하고 있다. 농요란 농민들이 힘들고 바쁜 일손으로부터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들노래 또는 농사짓기소리라고도 한다. 예천 통명농요는 경북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의 농민들이 매년 모심기를 할 때 힘겨운 노동으로 인한 고달픔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르는 농요로 조선 중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심기할 때 부르는 '아부레이수나'와 모를 다 심고 논에서 나오면서 부르는 '도움소소리', 논을 맬 때 부르는 '애벌매기소리'와 '상사디야', 논을 다 매고 나오면서 부르는 '방애소리'·'에이용소리',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캥마쿵쿵노세, 마당논매기, 타작소리인 '봉헤야'가 있다. 모심기소리나 논매기소리가 모두 느리고, 길게 빼는 음을 많이 쓰고, 노래를 메기고 받을 때에 앞소리의 끝과 뒷소리의 앞을 부분적으로 겹치게 불러 이중창적인 효과를 내는 점은 예천 통명농요의 특징이다. 한편 재단법인 나요당 농요상기념사업회는 40여 년을 농요 보존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나요당 이소라 이사장의 단독 출연재산으로 운영되는 재단이다. 농요연구 권위자 나요당 이소라 이사장은 "이 상은 당분간은 농요의 전승,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참된 일꾼을 그동안 보아온 자들 중에서 수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최측은 "정관에는 3년마다 1회 수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농요기념비가 2026년도에 세워진다면, 함께 제2회나요당농요상 시상도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농요기념비를 금년에 세울려고 오석을 보령에서 주문해 놓고 새겨질 글씨도 서예가로부터 받아놓았지만, 보존회 건물이 새로 증축되어서 1회 농요상만 시상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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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현 명인, “산조는 우리 삶의 소리”[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은 오는 5월 9일과 10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이태백류 아쟁산조와 원장현류 대금산조 전바탕 '긴산조 협주곡'을 초연한다. 아쟁과 대금의 깊이 있는 매력과 국악관현악의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뜻깊은 무대로 기대를 모은다. 이에 대금연주 명인 원장현 선생을 금현국악원 연습실에서 만나 이번 발표에 대해 들었다. Q. 선생님, 안녕하세요. 작년에 뵙고 딱 1년 만에 다시 뵙게 되었네요. 곧 있을 긴산조 협주곡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A. 반갑습니다. 그간 연주자로서 연주에 매진하고, 후학 양성에 힘쓰며 바쁘게 잘 지냈습니다. 연초부터는 동국대학교 석박사 과정 특임교수로 발령받아 강의를 나가고 있고, 공연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곧 있을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기획공연에서 할 긴산조 연습에 몰두하고 있죠. Q. 이번 공연은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기획공연으로 선보여지는데요, 선생님과 이태백 선생님의 긴산조가 창작악단의 국악관현악과 만나 연주된다는 게 너무 흥미롭습니다. 이번 공연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A. 말 그대로 긴산조를 협연하는 공연으로, 이태백 선생님의 아쟁 협주곡과 제 대금 협주곡 총 두 곡으로 진행됩니다. 저는 원장현류 대금산조 긴산조를 45분간 관현악단 반주에 맞추어 연주하게 될 텐데요, 전통이 근간이 되는 국립국악원이기에 이 무대가 시도될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권성택 예술감독의 오랜 바람이자 열정이기도 했고요. 특히 긴산조 협주곡은 이번에 최초로 시도되기에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보통 협주곡의 경우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20분 내외로 짧게 진행되는 편인데, 이번 협주곡의 경우 45분간 연주되어 산조를 아주 전문적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곡이 너무 길어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긴산조를 관현악 협연으로 선보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 일생일대 큰 기회가 아닌가 싶어요. Q. 김백찬 작곡가의 원장현류 대금산조 협주곡은 2022년 초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A.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가지고 만들어진 협주곡은 이전부터 많이 있었으나, 김백찬 작곡가의 협연 곡은 2022년 전북도립국악원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그때는 짧은산조로 20분 정도 짧게 연주되었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긴산조의 선율을 가지고 곡을 늘려, 더욱 풍성한 곡으로 완성되었습니다. Q. 짧은산조 버전의 협주곡과 긴산조 협주곡의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짧은산조는 긴산조를 축약하여 짧게 보여준 산조입니다. 긴산조는 산조 장르의 원형이자 모든 걸 다 보여줄 수 있는 특징이 있죠. 짧은산조 버전의 협주곡은 20분 안으로 연주가 끝나기에 연주자로서 체력적인 소모도 덜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짧고 임팩트 있게 감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긴산조 협주곡의 경우 ‘산조’의 멋을 그대로 다 느껴낼 수 있기에 긴 호흡으로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매력으로 작용할 것 같네요. 지금껏 협주곡을 수없이 많이 연주해 왔지만 45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주하는 건 처음입니다. 물론 최초이기도 하고요. 좋은 무대를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Q. 김백찬 작곡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이 곡을 준비하셨을 것 같은데요, 관현악의 경우 대금산조와 어떻게 어우러지도록 고민하셨나요? 선생님께서 연주하신 짧은산조 영상을 감상 해 보았는데, 관현악에 대중적이고 서정적인 코드 진행이 많이 녹아있어 감성적이고 편안하게 느껴지더라고요. A. 보통의 산조 협주곡은 산조답다고 해야 할까요? 독주 악기의 민속적 선법이나 선율을 따라 비슷하게 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김백찬 작곡가의 곡은 달라요. 감성적이고 친숙한 선율이나 코드 등이 활용되어서 대중적입니다. 그게 참 마음에 들어요. 관현악이 대금 선율을 감싸주며 풍성하게 만들어주니 훨씬 들을 거리가 많은 느낌이거든요. 아무리 좋은 보석도 어떻게 포장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 보이지 않겠어요? 물론 그 안에서 대금산조의 원형은 살아 있어야 하기에 나는 내 산조의 이야기를 확고하게 하며 연주할 것이고요. Q. 산조 협주곡이 이렇게 길게 연주되는 시도 자체가 처음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마치 클래식 교향곡 전 악장 길이와도 비슷한데요, 산조가, 그리고 긴 러닝타임이 어색하고 어려운 관객도 있을 것 같아요. 이 공연을 어떻게 관람하면 좋을까요? A. 산조는 인간의 소리, 우리 삶의 소리입니다. 처음엔 익숙지 않아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결국 우리 음악이기에, 차분히 열린 마음으로 듣다 보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45분 동안 연주하는 저도, 그리고 듣는 관객분들도 큰 집중력이 필요하겠죠? 산조의 틀은 어떤 악기가 연주하든 같습니다. ‘산조’라는 장르 안에서 악기 고유의 매력을 각각 표현하는 거죠. 그중 대금산조는 특히 대나무로부터 나오는 소리가 참 매력적입니다. 그 소리 자체에 집중하여 감상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Q. 이번 공연 이후, 올해 또 계획하고 계신 공연이나 작업이 있나요? A. 8월 말이나 9월 초에 원장현류 긴산조 독주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관객들과 편안하게 소통하며 관람할 수 있도록 소박하고 작은 공간에서 진행하게 될 것 같아요. 또 국악협회에서 주최하는 공연이 있어 곧 오사카에 가고, 진도 국악고등학교에 가서 대금산조를 잘할 수 있는 법에 대해 특강도 할 예정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연습과 후학양성도 꾸준히 할 것이고요. Q. 마지막으로 공연을 보러 올 분들께 한마디 해 주세요. A. 국악은 우리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소외당하는 장르로 치부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음악을 우리나라 국민이 아끼고 사랑해 주지 않으면 그 역사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나라에서 한식을 먹고, 한글을 쓰듯이 우리 음악도 생활 속에서 관심을 갖고 감상해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와 닿을 것으로 생각해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처럼, 국악을, 그리고 산조를 그저 어렵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 즐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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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우수 프로그램상, 3.1절 특집 다큐<br> '외면의 기록, 생존자'. 촬영상 수상한 강주진 감독KBS 3.1절 특집방송 '외면의 기록-생존자'가 3월 1일 방영되었다. 이 다큐를 제작한 KBS대전총국(국장 심각현) 제작팀이 KBS우수 프로그램상을 수상했다. 박지현 작가 강주진 촬영감독이 1년간 국내외 강제징용 피해자 중 생존하고 있는 14명을 찾아가는 과정과 진술을 다큐로 담아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136명이 사고로 수몰된 조세이 탄광 (해저탄광)을 비롯해 방직공장, 군부대, 비행장 등 곳곳으로 강제 동원된 피해 생존자 14명에게 듣는 역사의 기록이다. 제작팀은 코로나가 심했던 2022년 초부터 1년 동안 강제동원 현장 조세이탄광, 미이케탄광, 하시마탄광을 찾아서 피해자들의 고난과 상처를 다시금 새기고 기억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여전히 사과와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 무거운 경종을 울렸다. 본지와 인터뷰 과정에서 강주진 촬영감독은 "지난 2019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다녀 온 후 강제징용에 대한 다큐를 접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서 만나본 생존자들의 증언은 말로 다 담아낼수 없었다. 그나마 이 다큐에서 징용된 피해자들 중 생존자 14명의 기억 속에 생생한 '그날의 기억들'을 기록한다. 부디 이 기록을 통해 피해자들이 '외면' 당한 아픈 과거의 '내면'을 공감하고, 역사 진실 규명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라고 전했다. 피해자들은 모집 공고에서 숙식 제공은 물론 학업을 이어가게 해주겠다던 약속과 달리 현지에도착해서 마주한 것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시간이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이 독립한 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의 아픔과 여전히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도 짚어 본다. 또 일본 나가사키시에 있는 '일중우호 평화부전의 비'에 조선인의 피해는 언급하지 않고 80년 넘게 외면하는 일본의 민낯을 고발한다. 지난 1년간 14분의 생존자들을 직접 만났고 그들의 생생한 기억들을 카메라에 기록했다. 106살의 류기동 할아버지부터 101살, 100살, 99살, 98살... 이제는 초고령의 나이로 한 걸음 내딛기도, 한 마디 꺼내기도 힘든 노인이 된 생존자들... 하지만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어쩌면 이 기록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한일 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해결을 위해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지금! 생존자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 진심을 다한 사죄와 배상이다. KBS대전 개국 80년 UHD특별기획 '외면의 기록 - 생존자'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ekaXhQtEjQc)은 KBS대전에서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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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특집] "아이들을 내놓을리 없습니다…그들에게는 돈이니까요"편집자 주= 이번 특집 기사는 5월5일 어린이날을 맞아 그동안 진행했던 아동 관련 인터뷰 내용만을 묶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 보니 보육시설에 와 있었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해외로 입양됐으며, 성장한 뒤에 한국에 있는 친부모를 찾으려 했더니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 아이들의 일부는 성장 과정에서 폭행과 폭언을 당하고, 성 학대 피해를 보고, 정신 질환자로 취급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사람이 이 아이들을 걸어 다니는 돈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지른다. 그러니 아이들에 대한 학대는 없었는지, 입양 등의 과정에서 부정한 돈이 오간 것은 아닌지, 시설 대표의 횡령이나 인사 부정은 없는지 등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다음은 연합뉴스가 2022년 9월부터 진행한 [삶] 인터뷰 가운데 아동 관련한 내용만 묶은 것이다. ◇ 서기원 실종아동찾기 협회 대표 서기원(61) 대표에게 올해는 딸이 실종된 지 30년이 되는 해다. 그는 여전히 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4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그동안 매년 힘들었지만, 올해는 더욱 힘들다"면서 "정신적으로 힘들고, 몸도 아프다"고 했다. 서 대표는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세월만 흐르고 있어 화가 나고 안타깝다"면서 "실종 아이의 부모들은 수사권이 없기에 경찰만 바라보고 있는데, 경찰이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장기 실종 아동 수사는 경찰의 광역수사대 미제사건팀에서 최근에 형사기동대로 옮겨졌지만 전담 수사를 하지 않는 한 해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했다. 서 대표는 더 이상 아이들이 실종되지 않도록 부모들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나들이할 때는 사전에 지문 등을 경찰에 등록해 놓는 게 좋다"면서 "목이나 손목에 연락처 등을 걸어놓는 방식은 상황에 따라서는 유괴범의 협박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연합뉴스가 작년 5월12일 송고한 [삶] 실종 자식 찾으려 광주리 장사하면서 집집 방문하는 어머니, 5월17일 내보낸 [삶] "해외 입양은 인신매매였다…국가가 범죄에 가담"에 들어 있는 서기원 대표의 답변이다. -- 외동딸 희영의 실종사건 내용은. ▲ 초등학교 4학년, 만 10세였던 희영이가 실종된 것은 1994년 4월 27일이었다. 그날 오후 3시께 학원에서 외갓집으로 왔다가 놀이터로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희영이 외갓집은 우리 집 근처에 있었다. 나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관들은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더니 다음 날 오후 늦게서야 현장에 나왔다. 그 이후로 3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이를 찾지 못하고 있다. -- 실종아동 가족들의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 ▲ 대부분의 부모가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다닌다. 재래식 화장실, 맨홀 안을 뒤지기도 하고, 광주리장사를 가장해 집집이 방문해 혹시 자기 자식이 있는지 살피기도 한다. 상당수 가정의 가계는 파탄 나고, 80% 정도는 이혼한다. 실종된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에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겨울에 난방도 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만, 실종 아이 부모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삶을 견뎌야 한다. -- 본인은 딸을 찾기 위해 어떤 곳을 방문했나. ▲ 전국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윤락가도 뒤졌다. 보육시설, 장애인시설 등 각종 시설 3천 곳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없다는 답장은 2∼3곳에서만 왔다. 거의 모든 시설이 답장조차 안 한다. -- 보육시설은 협조를 잘 안 해주나. ▲ 보육시설에 직접 방문해서 입소자 파일을 보자고 하면 안 보여준다. 그래도 다시 한번 요청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 없다고 하면 없는 줄 알면 되지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이러느냐"고 화를 냈다. 파일을 열람해 봐도 아이 사진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부 보육원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우리를 데려가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학교에 간 아이, 학원에 간 아이, 밖에서 노는 아이 등이 많다 보니 그렇게 아이들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보육시설에 가서 아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보육시설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나. ▲ 아이들이 생계 수단이기 때문이다. 보육원 아이 한 명에 많게는 연간 1억원 정도의 정부 예산이 들어간다. 실종자 부모가 보육원에서 아이를 찾아내면 보육원 입장에서는 수입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를 내줄리 없다. -- 실종 아이들은 주로 어떻게 되나. ▲ 범죄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면 보호시설, 보육시설, 장애인시설 등 시설을 거쳐 국내외로 입양되거나 국내 보호 시설에서 성장한다. -- 해외 입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는 것은 범죄와 다름없다. 입양을 원하는 외국 가정이 아이의 특정 유형을 제시하면 입양기관이 보육시설을 돌아다니면서 적합한 아이를 찾는다. 이 과정에서 수천만 원의 뒷돈이 오간다. 한국의 아이를 입양하는 외국의 가정은 자기 나라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다. -- 정부는 해외 입양과정에서 뒷돈이 오가는 것을 모르나. ▲ 정부는 알고 있다. 과거에 보건사회부(지금의 보건복지부)가 금품 제공 실태를 조사하려다 그만둔 일이 있다. ◇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조윤환(45) 대표와 그의 누나는 각각 6살과 7살 때 어머니에 의해 버려졌다. 조 대표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누나는 서울역에 유기돼 각각 부여와 목포의 보육원에서 자랐다. 조 대표의 누나는 보육원에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서울 용산구의 지역과 다니던 교회의 이름까지 정확히 말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보육원에게 고아들은 모두 돈이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30여년만인 2018년에 부모를 찾았다. 경찰은 수사에 들어간 지 불과 몇개월 만에 부모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확인했다. 이는 경찰이 고아들의 부모를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 조 대표는 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현재 전국의 보육원에는 2만5천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다"면서 "이 가운데 절반가량은 부모의 이혼 등에 의해 들어온 아이들이고, 나머지는 부모에 의해 유기된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 보육원 아이들은 철저히 통제된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방치되는 경우가 있다"면서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고 보육원 내에서 게임을 하고 있어도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조 대표는 "아이들이 뭔가를 요구하고 귀찮게 굴면 보육원은 정신과 약을 먹이는 사례도 꽤 있다"고 했다. 그는 "어린이날에 보육원 아이들은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서 가족 중심의 명절인 설날이나 추석보다는 덜 외롭다"면서 "행사의 주최 측 목적에 맞게 끌려다니기보다는 자신의 꿈과 소망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날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2023년 4월21일 송고된 [삶] "나는 6살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누나는 7살에 서울역에 버려졌다"는 기사에 담긴 조윤환 대표의 답변이다. --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려졌을 당시를 기억하나. ▲ 6살 때였다. 엄마와 함께 천안 외할머니댁에 며칠 머무른 뒤 서울 집에 가기 위해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엄마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를 모셔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엄마가 나의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벌을 주는 줄 알았다.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할 테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엄마 동전에도 손을 안 대고, 엄마가 주는 옷을 그대로 입고, 편식하지 않겠으니 한 번만 엄마를 보내달라고 빌었다. 울고 또 울었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밤이 돼서 경찰이 나를 데려갔다. -- 찾아온 경찰관한테 뭐라고 했나. ▲ 울면서 엄마를 찾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경찰은 나의 손을 잡고 터미널을 한 바퀴 돌고는 엄마가 없으니 이제는 가자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터미널 내 한구석에 숨어서 나를 계속 지켜봤다고 한다. 어머니는 경찰관이 나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터미널을 떠났다고 한다. -- 경찰서와 대방동 보호소, 보육원은 부모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았나. ▲ 나는 경찰에 나의 이름과 누나의 이름 정도는 정확히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서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방동 보호소에서도 나는 누나 이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으나 성장한 뒤 확인해봤더니 기록돼 있지 않았다. -- 누나도 부모를 찾아달라고 보육원에 부탁했을 텐데. ▲ 누나는 한국 나이로 8살이었으니 본인과 동생, 어머니의 이름을 또박또박 댈 수 있었다. 누나는 부모를 찾아달라고 보육원에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도 무시당했다고 했다. 당시에 누나는 다니던 용산구 평강교회도 기억하고 있었다. -- 보육원은 왜 누나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나. ▲ 고아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고아 한명을 데리고 있으면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온다. 누나가 보육원에서 나가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든다. 이런 것이 인신매매다. ◇ 이경림 세움 대표 이경림(59)은 교도소 수용자 자녀들을 지원하는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의 대표다. 수용자 자녀는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데도 사회적 형벌을 받는다. 생계가 어려워지고, 소년·소녀 가장이 돼서 홀로 살기도 한다. 이 대표는 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부모 중 1명 또는 양부모가 교도소에 있는 18세 미만의 아이는 전국에서 1만여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는 "어린이날을 맞아, 세움이 지원하는 미취학 아동과 초등학생에게는 과자 선물 세트를 보냈고, 중고생에게는 친구들과 즐길 수 있도록 영화와 팝콘의 티켓을 보내줬다"고 했다. 이 대표는 "세움은 이번 어린이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면서 "정부도 수용자 자녀의 소중함을 인정한 것이니 수용자 자녀들은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2023년 10월27일 송고한 [삶] "엄마, 나 살고 싶어요…우리 이렇게 죽지 말아요"라는 제목의 기사에 담긴 이경림 대표의 답변이다. -- '세움'은 어떻게 시작됐나. ▲ 초등학교 5학년생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으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트럭에 채소를 싣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무면허 사고로 수감됐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부인과 이혼한 상태였기에 딸을 동네의 지인한테 맡겼다. 얼마 후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이 사람이 아이를 성적으로 학대한 것이다. 이 아이가 로뎀나무 집에 오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 나는 수용자 자녀에 대한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 세움은 주로 어떤 일을 하나. ▲ 부모 중 한명 또는 부모 모두가 수감되면 그 자녀들은 위기에 빠진다.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고, 정서적으로 흔들린다. 돈이 없어서 면회도 가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한다. -- 부모가 범죄를 저지르면 자식들의 마음은 어떠할까. ▲ 양가(兩價)감정이 있다. 내가 왜 저런 부모한테 태어났는가 하는 원망이 있을 수 있다. 동시에 사람들이 범죄자라고 비난하지만 나한테는 하나뿐인 엄마이고 아빠인데,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 수용자 가족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는 일도 있을 듯한데. ▲ 한 엄마는 평범한 주부였다. 어느 날 남편은 사업 실패로 경제사범이 돼서 수감됐다. 알고 보니 남편은 바람까지 피웠다. 이혼한 엄마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지방에 내려갔다. 공장에 취업했지만, 생활이 쉽지 않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까지 왔다. 이 엄마는 죽고자 했고, 아이들까지 하늘나라로 데려가려 했다. 이때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초등학생 아이들 3명은 "엄마, 나 죽기 싫어. 나 살고 싶어. 우리 죽이지 말고 같이 살아요"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세 아이를 껴안고 목 놓아 울었다. 엄마는 아이들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면서 후회했다. ◇ 김성은 갈렙 선교회 목사 김성은(59) 목사는 탈북민을 한국에 데려오는 일을 많이 했던 사람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한국으로 인도한 탈북민이 1천여명에 이른다, 그가 직접 밀림을 헤쳐가면서 탈북민을 구출하는 모습은 다큐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에 담겨 있다. 그의 부인 박에스더 목사도 북한군 중대장 출신의 탈북민이다. 뇌 병변 장애를 갖고 있었던 아들은 부부가 탈북민 지원 자금을 얻기 위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7살의 어린 나이로 숨졌다. 김 목사는 4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북한의 어린이들은 자기 행복보다는 가족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힘겹게 일을 하거나 구걸을 하고, 심지어 도둑이 되기도 한다"면서 "북한의 어린이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2013년에 남한으로 구출한 탈북 고아 신혁이는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구걸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면서 "신혁이는 갈렙 선교회의 도움으로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남북한 어린이 모두가 손잡고 행복한 통일 한국을 만들어갈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아래 내용은 올해 3월29일 송고한 [삶] "난 좀 전에 먹었으니 이건 아들 먹어"…결국 굶어 죽은 엄마에 들어있는 김성은 목사의 답변이다. -- 꽃제비의 어원은. ▲ 북한과 중국 접경지역에서 여기저기 떠돌며 구걸하는 북한 아이들을 꽃제비라고 부른다. 러시아어로 '꼬체비예'는 유랑인, 떠돌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꽃제비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 어떤 아이들이 꽃제비가 되나, ▲ 부모 모두가 죽거나, 아버지나 어머니 한 분이 사망해서 꽃제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양친이 모두 살아 있는 꽃제비도 있다. 아버지, 어머니라고 해서 더 이상 아이를 먹여 살릴 능력이 안 되니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만나겠지'라는 생각으로 흩어져 각자 자기 입은 자기가 건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먹을 것이 생기면 "나는 먹었어. 너 먹어"라고 하면서 자꾸 자식에게 건네고는 굶어 죽는 경우다. -- 꽃제비들은 두만강을 건너오기도 한다는데, 위험하지 않나. ▲ 자동차 타이어 튜브를 타고 강을 건너기도 한다. 북한군 경비병은 아이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알고도 봐주는 경우가 많다. 어린아이들은 중국에서 잡혀 북한으로 끌려와도 대체로 처벌받지 않는다. 꿀밤을 맞는 정도다. 북한군 경비병은 강을 건너는 아이들에게 '경제과제'를 주기도 한다. 구걸해서 얻은 돈으로 담배나 신발 등을 사오도록 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코로나 사태 이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꽃제비들이 국경선을 넘을 수 없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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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델(Bethell)선생 경모대회, 서길수 교수의 외침!"저는 5년간 정리한 끝에 2022년 ‘동북공정 백서’를, 2023년 ‘중화인민공화국 국사가 된 (고)조선·부여·고구리·발해’라는 책 2권을 펴냈고, 2년간 3·1절마다 민족사를 훔쳐 간 패권주의를 규탄하였습니다.” 서길수 이사장의 호소였다. 이 결과는 2021년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한 달간 고구리·고리연구소와 열심히 힘을 합해 제작한 프로가 방영되지 못하였다. 2022년 조선TV 보도본부 ‘탐사보도 세븐’도 동북공정백서 학술대회 현장을 찍고 발표자 인터뷰를 하는 등 열심히 제작하였으나 방영되지 못하였다. 2022년 3월 18일 취재해 간 한국경제신문 ‘여론독자부’ 기사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에 대해 배설(Bethell)선생 경모 115주기를 맞아 서길수 이사장의 통한의 외침이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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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만나 보는 '제94회 남원춘향대전'[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로 손꼽히는 남원춘향대전(남원춘향제)이 오는 5월 10일(금)부터 5월 16일(목)까지 7일간 남원시 광한루원 일대에서 열린다. ‘춘향, Color 愛 반하다’라는 주제로 올해 94회째를 맞는 이 축제는 다채로운 콘텐츠와 공연예술 프로그램, 다양한 볼거리를 포함하여 시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만족도 높은 축제를 지향하며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기존에 5일간 진행되던 것을 7일로 늘리며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축제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라 하여, 민속악을 중심으로 국악의 활성화에 앞장서는 남원의 대표 전통예술 기관 국립민속국악원 김중현 원장님(남원춘향대전 운영위원장)과 남원춘향대전 총괄을 맡은 이영규 팀장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안녕하세요. 원장님, 팀장님. 이렇게 뵙고 인터뷰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곧 있을 춘향국악대전 관련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요. 그 전에 먼저 원장님과 팀장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 안녕하세요. 저는 국립민속국악원 원장 김중현입니다. 국악원 원장직을 통해 국악 공연과 연구, 교육 사업 등에서 총괄 책임을 맡고 있어요. 직원들과 함께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춘향국악대전 운영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 안녕하세요. 이번 제94회 춘향국악대전 총괄팀장을 맡고 있는 이영규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맡아 준비하고 있고요, 이제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아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Q- 5월 10일부터 16일까지 펼쳐지는 이번 제 94회 남원춘향제는 최장수 전통문화축제로 꼽힌다고 들었습니다. 춘향국악대전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이-춘향국악대전은 그동안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가장 오래된 축제입니다. 이 축제는 일제강점기 시절, 문화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지역민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만든 축제라는 데에도 의의가 있어요. 공연예술부터 다양한 행사나 먹거리 등으로 관람객 모두에게 만족도가 높은 축제입니다. Q- 이번 축제는 기존의 5일에서 일주일로 늘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역대 춘향제와 다르게, 올해 남원춘향제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행사나 기획도 있나요? 이- 이번 춘향국악대전은 무엇보다 ‘춘향전 속 주인공이 되어보자’는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축제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한복을 입고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요. 2월부터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복 기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요. 현장에 한복 대여소를 운영 할 예정이라, 관객들이 모두 무료로 한복을 빌려 입을 수 있어요. 직접 가져오셔도 좋고요. 한국의 문화를 맘껏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Q- 춘향전 속 주인공이 되어 모두가 한복을 입을 수 있다니, 정말 색다르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은데요. 춘향전을 모티브로 잡은 이유가 있나요? 이- ‘춘향전’의 가치는 ‘사랑’이잖아요. 사랑은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고, 춘향의 사랑에는 특히 용기와 헌신, 희생이 드러납니다. 이는 서양의 고전적 사랑과는 또 다른 동양적, 한국적 의미가 도드라져요. 이에 춘향의 사랑을 주제로 하여 보다 세계적인 축제로 확산시키고자 춘향전을 모티브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남원춘향제에서 개최하는 미인선발대회인 ‘글로벌 춘향선발대회’도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데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절개를 지킨 춘향의 사랑을 또 다른 K-Culture의 문화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 올해는 특히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일본, 캐나다 5개국에서 동시 개최하여 글로벌 축제로써의 한 걸음을 딛어냈습니다. Q- 이번에 국립민속국악원과 춘향국악대전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요. 국악원에서 맡고 있는 공연이나 행사도 있나요? 김- 우리 국립민속국악원에서는 춘향제 초청공연으로 5월 12일, ‘남원에 새봄이 들어’라는 창극을 선보입니다. 총 41명의 단원이 출연하고요, 이몽룡이 암행어사로 장원급제한 후 남원에 돌아와 춘향과 만나는 장면을 그려 낼 예정입니다. 춘향국악대전은 공연예술제이기에 남원시가 선보일 수 있는 가장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입니다. 우리 국악원도 이에 함께 연계하여 더 훌륭한 무대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Q-국악인들의 축제인 대한민국 춘향국악대전도 빼놓을 수 없겠는데요, 특히 일반부 종합 결선과 판소리 명창부 결선에서는 청중평가단의 평가가 들어가는 것이 독특합니다. 이렇게 일반인 청중을 평가단으로 세우는 이유가 있을까요? 김- 청중평가단의 평가를 포함하여 공정하게 꾸려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춘향국악대전은 오랜 역사와 함께 실력 있는 국악인들이 거쳐 가는 등용문이기도 하죠. 공정한 심사를 위해 먼저 지역 쏠림이 없도록 지역 안배를 합니다. 또 심사위원 검증위원회를 두어, 예술마루에 등록된 심사위원을 최종 선발하게 됩니다. 논란 없이 최대한 공정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Q- 펼쳐지는 공연을 보니, 판소리 춘향가와 전통 음악, 창작 국악, 관현악, 농악을 비롯하며 중국과 일본의 전통 공연까지 진행되더라고요. 역시 전통을 중시하고 사랑하는 남원의 특색이 많이 묻어납니다. 관객들이 국악 무대를 많이 즐기나요? 이- 전통을 중심으로 하는 축제이기에 더욱 신경 써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남원과 우호 관계를 맺은 중국과 일본의 전통 공연을 초청하여 선보임으로, 국가 간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들 것입니다. 또 남원 분들은 귀명창이 참 많으세요. 그래서인지 국악과 전통예술 공연에 늘 관심이 많고 즐겁게 잘 즐기십니다. 김- 맞아요. 추임새도 정말 잘 해주시고, 국악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게 느껴집니다. 국악원에서도 토요일마다 완창 판소리를 개최하는데, 남원 관객분들은 그 긴 시간을 늘 끝까지 다 들으시고, 반응해 주시죠. Q- 지역 인구가 소멸해 가고 있고, 도시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때 지역 축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지속가능성 있는 축제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 무엇보다 지역 문화가 활성화되는 게 크겠죠. 외부 관광객들이 이 축제를 통해 남원의 문화를 알게 되고, 관광지를 구경하기도 하며 관광산업이 발전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5월 10일부터 11일, 춘향문화예술회관에서 ‘춘향제 100년, 지역축제 진화와 혁신’이라는 주제로 전문가분들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텐데, 그때 지역축제산업과 로컬관광에 관하여 깊이 있게 다룰 예정이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여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이 축제를 통해 남원이 발전하는 것 외에도,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고자 하는 긍정적 효과가 보입니다. 문제로 대두되던 바가지요금이나 비싼 식품 가격에 대해서도 시에서 개입하여 근절시키고자 하고,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여 더 나은 축제로, 관광지로 만들고자 노력하죠. 남원은 지금까지 체류형 관광지가 아닌 잠깐 들렀다 가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하지만 남원춘향제를 통해 이 지역이 더욱 홍보되고, 주변 상권을 살릴 수 있다면 더욱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될 수 있겠죠. Q- 그 외에 올해 춘향국악대전에서 색다르게 펼쳐지는 행사나 기획이 있다면 어떤 게 있나요? 이- 11일부터 12일까지, 주민 4,000여 명이 참여하는 대형 퍼레이드 공연인 대동길놀이가 펼쳐집니다. 춘향전 속 명장면을 연출하는 퍼레이드형 놀이인데요. 예를 들어 춘향과 이몽룡의 만남이나 이별,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오는 장면 등을 구성하여 펼쳐냅니다. 자발적인 주민 참여형 커뮤니티를 만들어, 시민이 직접 준비한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죠. 그 외에도 남원시에서 활동 중인 농악단의 대규모 농악 공연을 광한루에서 매일 볼 수 있다는 것과, ‘판락’이라고 하여 판소리와 락(Rock)의 콜라보 공연, 한복을 입고 하는 EDM 파티, 공군 에어쇼 등 볼거리가 정말 많습니다. Q-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가 참 많은 것 같아 더욱 기대되는 축제입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김- 국립민속국악원은 춘향테마파크 안에 있습니다. 그만큼 국악원에서도 춘향 관련 전시나 교육 등을 자체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남원에 들르셔서 축제를 즐기고, 그 김에 국립민속국악원도 방문하신다면 더욱 즐겁고 알찬 시간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전국에서 열리는 축제는 1,500여 개 정도인데요, 보통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게 주가 됩니다. 춘향국악대전에선 먹고 마시는 것 외에도, 한복을 입고 춘향전의 주인공이 되어 조선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색다른 시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또 ‘난장’이라는 야시장을 통해 막걸리 축제를 병행할 예정이에요. 특히 이번에는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와 협업하여 맛있는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남원 막걸리와 함께 즐길 수 있으니 꼭 놀러 오셔서 좋은 추억 만드시길 바랍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춘향테마파크와 광한루원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남원은, 어딜 가든 춘향과 몽룡이의 사랑 이야기가 곳곳에 묻어났다. 춘향의 사랑을 주제로 관객 모두가 춘향전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춘향국악대전’. 가장 오래된 ‘최초의 지역축제’인 만큼 그 준비 과정 또한 쉽지 않아 보였지만, 그 가치를 드높이고 관객들에게 더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더 나아가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고, 대표 지역축제로써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지가 와 닿았다. 더욱 발전하기를 함께 소망하게 되었다. 푸르른 5월, 조선시대로 돌아가 춘향이, 또 이몽룡이 되어 색다르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춘향아 이리와 업고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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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의 채치성 예술감독을 만나다[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봄비가 촉촉이 땅을 적시는 4월,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지 6개월이 된 채치성 예술감독님을 만났다. 그는 국악방송 사장, KBS 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 KBS 라디오 국악 프로듀서 등을 지내며 기획력과 단체 운영 역량을 인정받아 온 국악계의 원로다. 감독님이 꾸려나갈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방향성과 국악 및 국악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감독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고 인터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취임 축하드립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A. 지난 11월부터 감독직을 맡게 되어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왕 오게 되었으니 더욱 잘 이끌어서 명실상부한 악단으로 자리매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력 중입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업무를 보는 데 치중하고 있어요. 악단 연주 일정은 제가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올 9월까지 기획되어 있었기에, 저는 올 10월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연주나 행사를 기획하여 시작하게 됩니다. 10월 2일에 진행될 공연에서는 제가 직접 작곡하고 지휘한 곡도 연주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Q. 국립국악관현악단은 늘 색다르고 다양한 관현악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어 항상 흥미로운데요, 이 악단을 앞으로 어떻게 꾸려 나가고 싶으신가요? 감독님께서 이끌기를 원하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방향이나 음악적 가치 등이 궁금합니다. A. 무엇보다 국립단체이기에 우리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음악이 뿌리 깊게 근간이 된 가장 한국적인 무대를 더 많이 기획하고자 해요. 지금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은 현대적인 음악 어법이나 타 음악 장르와의 협업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 왔습니다. 관현악을 통해 대중적이고 다양한 색채를 선보였고, 단원들의 기량 또한 많이 향상되었는데요. 이를 발판 삼아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연주 기획을 많이 하되, 그 바탕에는 우리 음악을 잊지 않고 두고 싶습니다. 우리 장단과 우리 선율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관현악곡을 무대에 올려, 국립 악단으로써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고 싶어요. Q. 정오의 음악회나 관현악시리즈 등 정기적으로 선보이는 대표 시리즈가 있다는 것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이런 시리즈는 어떻게 준비되나요? 관객들의 반응이 참 좋다고 들었습니다. A.정오의 음악회는 오랜 인기와 함께 늘 매진입니다. 대중들이 아주 좋아하는 시리즈인데요. 대중에게 익숙한 연예인이나 국악인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을 들려주며 관객들과 소통한다는 것이 이 시리즈가 장기간 흥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관현악시리즈 또한 다양한 관현악곡을 조명하고 연주하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입지를 단단히 만들어 주는 데 한몫을 하고 있죠. Q.혹시 또 다른 시리즈나 새로운 공연이 계획되어 있나요? A. 6월에 계획된 야외 음악회 ‘애주가(愛酒歌)’라는 공연이 있습니다. 음악에 소량의 시음을 곁들이는 공연인데, 전통주를 마시며 전통음악을 관람하는 참신한 공연이라 아마 많은 분이 좋아하실 것 같네요. 또 국립합창단이나 창극단 등 국립극장에 소속된 전속단체들과 함께 합동하여 선보이는 브랜드 공연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Q. 감독님은 오랜 기간 국악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 오셨잖아요. 작곡뿐 아닌 방송 쪽에서도 국악 콘텐츠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A. 1981년, KBS에 입사하여 PD로 활동한 것이 저의 첫 방송 생활이었습니다. 30분짜리 국악 관련 방송을 맡아 진행했기에 국악 음반 자료가 필요했는데, 그 당시엔 방송용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월요일마다 KBS 스튜디오에서 연주자들을 불러 음악을 녹음해 아카이빙을 쌓았죠. 그렇게 방송 시간을 늘릴 수 있었습니다. 그 녹음 자료가 지금까지 쓰이니, 방송계와 국악계에 도움을 줄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국악방송에 재직하면서부터는 오로지 국악에 몸 바쳐 왔습니다. 국악 맞춤형서비스 등의 새로운 시도에도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이제는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편하게 들을 수 있도록 베를린 필하모닉처럼 생중계 시스템을 발전시켜야 해요. 그렇게 되면 공연장에 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고, 우리 음악도 멀리 뻗어져 나갈 것입니다. Q. 그렇다면 국악의 대중화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A. 대중성과 전통을 잘 엮어서 우리 음악이 어렵지 않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 어법에 맞는 연주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 음악에 대해 이해하고, 우리 음악의 맛을 잘 살린 콘텐츠를 언론에 노출, 홍보하며 대중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음악은 충분히 생활화가 가능하고, 참 재미있으니까요. Q. 감독님께서는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국악을 경험할 기회를 많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어릴 때부터 국악을 접했기에, 그 경험의 소중함을 잘 아는데요. 곧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어린이 음악회 ‘별별 땅땅’이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A. 음악 교사직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학생들에게 단소를 만들어 가르쳤는데, 그 학생들이 지금까지도 그때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고 해요. 그만큼 어릴 때 음악언어를 알고 경험하는 게, 교육이 아주 중요합니다. ‘별별 땅땅’은 단원들이 소규모로 연주하고, 아이들이 국악을 친숙하게 받아들이도록 놀이 형태로 체험할 수 있게끔 해주는 공연입니다. 국립극장은 어린이 공연이 참 많습니다. 이 공연도 장기 공연인데, 많은 분이 믿고 찾아주셔서 늘 감사하죠. Q. 선생님께서 만드신 곡 ‘꽃분네야’가 생각납니다. 그 곡은 선율도 참 좋지만, 가사도 정말 정겹고 아련한 느낌이 들어요. 국악가요라는 장르가 그 곡으로 인해 시작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곡을 만들 때 가장 치중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A. ‘꽃분네야’를 통해 우리 정서를 담은 대중가요를 가장 먼저 쓰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작곡, 작사를 할 때 우리 음악과 우리 말 어법이 다 들어가 있는 것이 중요해요. 특히 가사를 쓸 때 그 점에 가장 치중하여 작업합니다. 영어는 관사가 앞 박이지만, 우리말은 반대죠. 강세와 문장의 어법을 막무가내로 쓰지 않고, 문장이 말이 되도록,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적으로 장단이나 선율 등 한국적인 정서를 포함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Q.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님으로서, 또 국악 분야의 원로로서 앞으로 어떤 것을 계획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A. 예술감독직을 수행하며 국민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공연을 많이 해야겠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서울에 자리하고 있지만, ‘국립’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악단입니다. 그 이름답게, ‘찾아가는 국립극장’ 프로그램처럼 서울 외의 지역에 가 공연한다든지, 문화소외계층이 국악을 경험할 수 있게끔 다양한 무대를 더 많이 기획하여 꾸리고자 해요. 그리고 무대를 영상으로 남기거나 송출하는 영상화 사업에도 힘을 많이 쏟을 예정입니다. 채치성 예술감독님이 인터뷰 내내 강조하던 것은 ‘가장 한국적인 우리 음악’이었다. 우리 음악이 가진 독자적인 묘미, 아름답고 가치 있는 그 매력을 잃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던 목소리에는, 오랜 시간 국악계에서 국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던 그의 열정과 사랑이 묻어났다. 앞으로 채치성 예술감독님이 이끌어 갈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굳건하고 아름다운 무대를 더욱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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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2세가 부르는 서러운 아리랑사할린한국교육원장 3년간 업무를 마치고 귀임한지 1년이 지났지만, 사할린 동포들의 서러운 처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코로나 시절 함께 불렀던 아리랑 선율에 따라서 부른 개사한 노래를 불러본다. 교육일지와 사진 속에 있는 사할린 동포 2세들의 얼굴들을 떠 올려본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간절한 소망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동포들의 뼈져린 한은 영주귀국으로 조국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다. 한국으로 가신지 30년이 지나고 이미 영주귀국 후 연로하신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2세대 자녀 한명과 그 배우자를 영주귀국 대상으로 확대되었다.(2021년) 그 이전까지는 풀릴 기미가 없이 가슴 아프게 지속되었다. 1세대 부모가 사망한 2세대 자녀들에 대해서는 현재 법적으로 영주귀국이나 귀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국적 취득에 관한 속지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말하고 쓰고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술김에 흥얼거리는 아리랑이나 민요 가락을 들으며 자랐고, 한국의 전통 풍습과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에서 가져 오거나 사할린에서 만들어 쓴 조선의 생활물품을 늘 보고 쓰며 아버지, 어머니 따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 냉전의 시기를 살아 왔다. 해방 후 냉전 시기에 사할린 한인들은 억류되어 감시 당하며 사회주의 소련땅 사할린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신분이었다. 이동과 취업, 인간으로서의 권리적 측면에서 차별과 멸시는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의 발전상이 보도되면서 급격히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어린 시절 당했던 차별과 수모에 대해서는 늘 대화의 끝에 "정말 숱하게 멸시를 받았어." 하시며 푸념하듯 말씀하시곤 했다. 오죽했으면 한인 2세대인 사할린태권도협회 안수학 회장은, 어린 시절 차별과 수모에 반대하여 싸움을 자주 했고, 김치 냄새난다고 놀리는 러시아 아이들 혼내주고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가라테를 배웠으며, 한러수교 후 태권도를 다시 익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지 않고 평생 무국적으로 살다가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대하고 있었고 2세대 자녀들은 귀환을 믿으며 굳건히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냉전과 사회주의 시절을 살다가, 한국의 발전상이 사할린에 알려지고 사할린 한인의 존재와 귀환의 문제가 공영방송을 타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 사실 한-러 수교 이전에도 KBS사회교육방송(현재 한민족방송)에서는 사할린 한인동포들이 고국의 친지에 전하는 사연들이, 일본으로 이중징용 되어 재일동포가 된 지인을 통해 전달되어 방송이 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냉전 시기에 관심도 지원도 교류도 불가능한 시기였다. 1990년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고국방문이 이루어질 때 한국에 다녀오신 1세대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주귀국 희망 신청이 이루지던 결정적 시기를 맞이하기 전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 시기에 생존해 계신 1세대분들은 영주귀국을 희망하고 신청하여 고국에 오셨지만, 사망하신 1세대분들은 영영 통한의 그리움 안고 타국 땅에서 숨을 거두고 그 섬에 묻히셨다. 사할린에 징용되었다가 일본으로 다시 이중 징용된 1세대 부모를 둔 2세대 자녀들은, 알음알음 정보를 얻어 일본의 한 공동묘지에서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기도 하였다. 이 얽히고 설킨 일제 강제징용과 식민시대의 압제와 희생, 그리고 조국으로부터 외면 당한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이분들에겐 실로 삶 전체가 버겁고 서러운 현실이다. 나는 어떤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주귀국 확정 전에 부모를 잃은 2세대 분들의 원한을 내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보고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다. 사할린 동포 지원 특별법에 "사망 등 다양한 사유로 영주귀국 신청을 하지 못한 1세대 동포들의 자녀들에게도 희망에 따라 영주귀국의 기회와 모국인 대한민국의 국적 취득이나 경제적 지원의 혜택을 드릴 수 있는 방안" 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범위의 2세대 분들 중에는 현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수령하는 분도 있고, 홀로 사업을 일으킨 분도 있으며, 이미 사할린 사회에 인정을 받은 문화 예술 공로자도 많다.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한다면 자녀들과의 이별을 두려워하는 분들도 많다. 따라서 그런 범위의 모든 2세대 분들이 영주귀국을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국이 풀어주지 못한 부모의 원한을 보며 겪으며 성장하고 기억하는 자녀들의 소망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국에서 살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 2세의 고통과 설움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사할린한국교육원과 유치원에서 25년간 한국어를 가르치시다가 2021년 영주귀국 신청으로 한국에 오신 2세 전영희 선생님은, 어머니가 2004년 병환 중에 영주귀국을 하셨지만 대한민국 국적이 나오기 전에 병원에서 사망하셔서 한국 국적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전영희 선생님은 영주귀국 대상이 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영주귀국 하시는 1세분과 재혼을 하여 배우자 자격으로 2021년 11월에 영주귀국을 하셨다. 그러나 배우자께서 역시 국적 취득 전에 별세하셔서 국적이 나오지 않아 애태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화가 난다. 영주귀국 하신 분이 돌아가시면 사후에라도 국적을 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래야 자녀에게도 법적으로 고국에서 살아 볼 기회가 생길 것 아닌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셨는데 남편이 국적을 받기 전에 별세하여 배우자의 국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내는 다시 돌아가라는 것인가. 너무나 법 적용이 허술하고 냉혹하다. 유독 사할린 한인, 사할린 동포들에게 더 냉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세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주귀국 허용된 2세 분들 중에는 한국어에 서툰 분들이 많고 일상 생활, 행정적 처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다. 고국 정착 과정에 난제와 장벽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사할린한국교육원의 한국어 교재를 다시 가져와 드린 적이 있다. 정착 지원 체계가 아직 자리 잡히지 않아 각자도생 해야한다는 말이 나왔다. KBS한민족방송이 주관하는 한민족체험수기대회에서, 2021년(사할린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 2022년(유즈노사할린스크 김경순) 성인 부문 대상을 모두 사할린 2세대 한인 어르신이 수상하셨다. 2021년 수상자 박영자님은,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이중징용 되셨다가 끝내 일본에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인사드리던 기막힌 디아스포라가 담긴 가족사를 글로 남겼다. 수상 인터뷰에서 "KBS가 주는 이 대상은 우리 가문의 영광이기 전에 사할린 한인 전체에 주는 상"이라며 "사할린에서 다시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으로 끌려가서 타국에 묻히신 외할아버지께 이 상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하셨다. 2022년 수상자인 김경순님은 아버지에 대한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90년대 중반 병든 노부모가 한달 간의 모국방문에서, 50년 만에 아들과 상봉 후 다시 이별하여 사할린에 돌아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영주귀국 신청을 해보지 못한 서러움에 관한 처절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쓰셨다. 특히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한국문화 수업시간에 배운 가수 조용필의 노래(그 겨울의 찻집)와 주병선의 노래(칠갑산) 가사를 바꿔 부모에 대한 기억, 조국 귀환에 대한 부모의 열망, 부모님과 10살 아들(김경순님의 오빠)과의 이별 장면 등을 가사에 담아 내게 보내셨다. 그 노래를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불러 보았는데, 부르다가 여러 번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터져 한참 후에나 완전히 부를 수 있었다. 그 노래 영상들을 김경순님께 내가 보냈고 김경순님은 한국의 조카들(큰 오빠의 자녀)에게 보내 드렸다고 한다. 그러면 조카들로부터 아버지 어린 시절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박영자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김경순님의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사연은, ㈜국악신문과 새고려신문과 ‘우리말방송’에도 게재되고 방영되었다. 김경순님 사연은 KBS한민족방송에서도 사할린과 전화로 연결하여 소개되기도 하였다. 나도 방송에 출연하여 사연과 노래 가사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소개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 1992년부터 시작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의 영주귀국 사업으로 현재까지 4,700여 분이 홀로 또는 배우자와 함께, 그리고 2021년부터는 '이미 한국에 사시는 부모님'의 2세대 자녀 1인과 배우자가 한국에 영주귀국하여 사신다.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되었거나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들을 ‘사할린동포’라고 정의한다. 이분들이 영주귀국이 허용된 사할린 동포 1세대이다. 따라서 사할린에서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자란 언니, 동생, 친구라도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영주귀국 지원 혹은 희망과 신청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영주귀국 사업 개시 당시 생존하는 1세대 한인에 한하여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신청 및 허용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은 영주귀국 사업과 신청이 이루어지기 전에 사망하거나 기타 사정으로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었던 부모를 둔, 2세대 사할린 한인 자녀들의 간절한 소망에 관한 것이다. 이분들은 2024년 현재 연령상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에 이르신 분들이다. 조국 귀환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불쌍한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통절한 한을 품은 채 살고 계시다. 어떻게든, 그렇게도 부모가 돌아가고 싶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계시다. 영주귀국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하고 싶어 하신다. 그런데 절차가 너무나 어렵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20년에서 부터 3년간 한국문화교류가 단절되는 시기 필자는 임시 탈춤강습과 탈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국립사할린대학 한국어과 학생들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 단원들에게 탈춤 기본 춤사위를 지도했다. 우리 민족은 어디를 가나 노래방이 있듯이 러시아는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사교댄스나 스포츠댄스 모임이 많다. 아마도 죽을 때가지 춤을 추다가 간다고나할까. 동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버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서 함께 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탈춤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렇게 동포들과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이산에 대해 4대 가족사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댄스 클럽에서 만난 오석만씨가 KBS한민족방송에서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2023년 우수상을 수상했다. 처음에는 누구나 한국어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사는 바로 잊혀진 한국사이고 동아시아 전쟁사라는 나의 설득에 용기를 내서 슬픈 가족사를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책으로 묶여 나와서 보내드리게 되었다.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한국어 수업이나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인들이 과제물로 내 놓은 체험수기 중 우수한 작품이 KBS한민족체험수기에서 매년 대상과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경순님은 한국교육원 수업에서 ‘그 겨울의 찻집’ 노래를 배우신 후 ‘눈물의 섬, 사할린’으로 가사를 정셨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가사 중에 특히 "사무친 한을 풀어 주세요."는 대한민국에 외치는 절규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서러운 아리랑 사할린으로 끌려 왔어요. 조선 땅에서 그 옛날 일본 놈들의 시달림 받고, 늘 괴로움에 떨었죠 가고픈 고향 한국 땅으로, 부모형제 사는 마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 한숨만 저절로 나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리워라 내 고향 사모친 한을 풀어 주세요, 하루 속히 날아 가고파 그늘진 세월, 고향 그리며, 철천지 한이 되었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꿈에서 본 내 고향 그리고 ‘칠갑산’ 노래의 곡조를 생각하면서 부모와 이별하는 어린 10살의 오빠의 심정을 감정이입하여 지은 ‘’ 가사는 이러하다. 이별의 부두 부모 잃은 어린 마음을, 그 누가 알아 주리요 외로웁고 서럽던 아픔, 누구에게 원망 주리요 어머니는 내게 같이 떠나자, 애닯게 속삭였지만 할아버지 무서워 끝내, 따라간다는 말을 못했소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난 날, 배 떠난 부두에 나가 하염없이 목 놓아 울었다오.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또 김경순님은 아리랑민족의 후예로서, 부모님과 큰오빠의 오십년 이별과 한번의 만남, 또 이별과 사별의 한, 전체 사할린 한인동포들의 고통의 역사를 담아 아리랑 가사로 쓰셔서 내게 보내셨다. 적절한 아리랑 곡을 찾아 보았는데, BTS의 아리랑이 긴 가사를 모두 담을 수 있었기에 노래로 불러서 보내 드렸다. 도중에 여러 번 목이 메었다. '한맺힌 사할린 아리랑'을 정리한 가사는 이러하다. 한맺힌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일제에 끌려 사할린 왔소. 모질던 징용살이 누가 아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간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믿음에 살아 낸 세월 [랩 버젼] 한달만 있다가 돌아간단 그말, 어찌나 기다렸는지. 밤이면 라디오 틀어 놓고서 혹시나 우리를 찾을까 봐. 애타게 기다린 자식 형제들 오십년 넘어서 만나보네. 수십년 세월을 참아 왔는데 언제 또 고향 땅을 밟아보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 넘어간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이 가사의 핵심은 부모와 어린 오빠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친 것, 그런 가엾은 부모를 보는 자식들 모두 차마 맨 정신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가엾다는 점이다. 영주귀국의 기회가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불쌍한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부모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도무지 소식도 없고 희망을 찾을 수도 없다. 이 아리랑의 마지막 가사들은, 그렇게 부모를 잃고 조국과 단절된 채 희망을 잃은 사할린 한인 2세대 자녀들의 심정을 그대로 외치는 절규다. "(조국 귀환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 뜨신 우리네 부모님들 불쌍하오 부모들 사모친 한 생각하면 애타던 자식들도 가여워라 너나없이 서럽고 아파 어이하오 2023년 9월에는 ㈜국악신문사(대표이사 기미양)를 통하여, 아리랑 무용단장 박영자님(갈리나 박)의 아리랑 가사를 받았다. 박 단장님 역시 일찍 부모를 잃고 영주귀국의 희망이 사라진 심정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 속의 조국에 대한 이미지와 당신의 현실에 대하여 "사할린 2세 아리랑"라는 재목을 달고 가사를 지으셨다. 아리랑 반주를 확장하여 가사를 붙여 서울의 사무실에서 불러 보았다. 사할린 2세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는 사할린 2세 한인 할머니, 하지만 부모 조국은 한국이라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 어릴 때 저 산 너머엔, 내 조국 있다고 믿었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십 년 세월 부모 잃고 서럽구나, 나도 이제 주름진 할머니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말문 터진 손주들 자주 묻는 말, 할머니와 조국에서 살 수는 없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발전되어 잘 사는 우리 조국 한국, 우리에겐 자랑스런 마음만 크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언젠가 이 생명 끝나기 전에, 조국 품이 우리 2세들 안아 줄까 한인 2세, 우리는 누구인가요 어릴 적부터 조국의 존재를 믿고 한국어, 한국문화로 정체성을 지켜 왔지만, 영주귀국 신청 시기 이전에 부모를 빨리 여의신 사할린 한인 2세 어르신들의 심정은 한결 같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국을 조국으로 선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당신들께도 주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할린 사회에 뿌리박은 삶의 터전을 옮기는 문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자녀들과의 이산, 다른 친지, 친구들과의 이산을 의미하며 기존의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의 상실과 영주귀국 후 생활보호대상자 신분으로서의 생활 등 수많은 심적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국이 부모의 한을 풀어 준다는 기본적인 정책의 도리와 그로부터 받는 부수적 혜택이면 충분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들의 국적 취득이나 자녀의 유학이나 체류 등에 있어서 유연함 같은 혜택일 수 있다. 엄연히 식민지 시기 타국으로 강제동원된 국민들의 자손이 아닌가 말이다. 202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 정권에 항복하여 붕괴되던 시기, 그간 한국 정부에 기여한 아프가니스탄 국민과 가족들을 우리 특수부대를 투입하여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데려온 미라클(기적)의 작전이 있었다. 그러한 쾌거는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한국 정부의 도덕성과 형제애 및 인류애를 상기시킨다. 그런 인류애와 형제애를 지닌, 정의로운 나라가, 강제로 희생된 일제침략기의 혈육과 자손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다. 또한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의 적용으로 인해, 명백한 국적 회복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상황(영주귀국 후 국적 취득 전 사망하신 경우)에서 비인륜적으로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그 자녀들의 기회가 방기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법의 취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법의 사각지대는 극단적으로 냉혹하게 2세대분들의 가슴을 갈라 놓는다. 법이 어째 그리 촘촘하지 못하여 법 구실을 다 못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일본 정부나 러시아 정부와 얽힌 외교적, 법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그런 문제 해결의 전제없이도 우리 정부의 결단이면 어느 정도 가능한 일 아닐까 생각한다. 하물며 인구도 수십년 간 하염없이 감소하고 있어 국가 소멸의 길로 가는 절체절명의 시기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묻고 싶다. 나는 2세분들의 사무치고 뼈저린 한마디 한마디를 기억한다. "왜 한국은 그렇게 발전했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죠? 옛날엔 가난했다, 전쟁으로 힘들었다, 다 이해해요. 그런데 지금은요?" "부모들은 우리에게 한국어와 한자를 가르쳤어요. 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잊으면 안된다고. 저 산 넘어가면, 바다 건너가면 조국 조선땅이 있다고 했어요. 고향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소련 시절에, 영주귀국 전에, 병으로, 이중징용으로 다 돌아 가셔서 우리들은 갈 기회가 없어졌어요. 우린 뭐에요?" "부모가 끝내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왜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은 못 살아 보는 거죠? 한국말도 말하고 생활방식도 한국식으로 잊지 않고 지켜왔는데?" 한국 교육부에서 파견 나온 교육공무원은 이에 대해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다만 ‘제가 그런 것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죄송해요.’ 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의 애환을 담은 가사에 노래를 불렀고, 교실과 공원에서 한국의 인기 가요를 불렀으며 탈춤을 소개하고 민속춤을 같이 추었으며 한국문화 수업을 했다. 그리고 ‘한국어말하기대회’에서 발표하실 내용을 컴퓨터로 옮겨 드리고 약간 교정하는 역할만을 했다. 나는 한국에 복귀 이후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행사에는 가능한 참여하고 있다. 지난 3월 23일 파주사할린동포회 영주귀국 15주년 행사에서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을 비롯한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사할린아리랑이 대합창으로 불려졌다. 사할린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믈을 흘리신다. 우리는 그분들이 흘리신 디아스포라의 눈물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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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세실풍류, 51명이 근현대춤 100년사 선보인다국립정동극장이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온 근·현대 춤꾼들의 100년 여정이 담긴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온 춤꾼 51명의 무대가 이번 달 매주 화·목요일 여덟 차례 공연이 이뤄진다. 배구자·최승희·조택원 등 신무용 시기 춤부터 200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댄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화해 온 우리 전통춤에서 신무용의 예술성을 감상할 수 있다. 근대 신무용이 등장한 1920년대부터 전후 무용학원 시대, 국립무용단 창단기, 1970년대 춤의 새로운 도화선이 됐던 한국창작춤, 현재의 컨템퍼러리 작품들까지 100년을 관통하는 우리 춤의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근대 신무용기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새로운 개념으로 한국창작춤의 태동을 알리는 시기였다. 4일과 9일에는 1920년대 신무용을 조명한다. 지난 4일 1920년대 서양 문화의 도입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탄생했던 신무용이 선보였다. 배구자·최승희·조택원의 작품을 김선정·노해진·안나경·최신아·국수호·김형남·김호은이 무대에 올랐다. 신민요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화하며 신무용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배구자와 신무용의 성행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함으로써 신무용 시대를 연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을 오늘날 새롭게 재현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 국악평론가 윤중강의 맛깔스런 해설로 흥겹게 진행되었다. 1920년대 신무용 선구자 '배구자의 '에여라 노아라' 민요춤을 김선정이 재현했다. 객석은 첫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1920년대 뮤직박스에 이끌려 시간이동을 하게 된다. 막이 오르자 어두운 무대 배경에는 서서히 배구자의 춤자태를 보여주는 사진이 나오고,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무용가는 잠시 그대로 배구자의 몸짓을 흉내 내고 정지 되어 서 있다가 춤을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 불려졌던 민요는 오늘날 불려지면서 지금 시대에서 느껴지는 정서보다는 다르게 젖어들었다. 소박하고 정겨웠다. 일상복을 입는 한복에 앞치마를 두른 이웃집 처녀가 집안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제 멋에 못이겨서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이다. 첫 무대는 많은 박수를 받으면서 다음 무대가 더욱 기대되었다. 다음은 '배구자의 타령춤'을 노해진이 재현했다. 무대 배경에 나온 배구자가 입은 무용복과 똑같이 재단을 해서 만든 옷인데, 배구자는 색동무늬가 박힌 옷을 입었고, 무용가는 화려하고 커다란 꽃이 그린 무늬가 박힌 무용복을 입었다. 노해진은 배구자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하려는 집중력 있는 연기력과 호흡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물 흐르듯이 시간이 흘렀다. 일단 타령조로 불린 무용곡이 신났다. 따라서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타령조라고 붙였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구자는 1936년 직접 부른 도라지타령, 천안삼거리 곡이 담긴 음반을 낸 가무악에 능한 예술가다. 이 두곡을 엮고, 배구자의 영상, 사진, 기사자료를 참조하여 만든 신민요춤이라고 소개가 되었다. 무용을 보여주는 동안 무대에서 나오는 영상에는 미국 자택에서 인터뷰하는 100세를 맞이하는 배구자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1928년 발표한 아리랑은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신무용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아리랑이 그 당시 최고의 유행가라는 것이 입증된다. 그만큼 배구자는 시대의 트랜드를 읽을 줄 아는 한국 근현대무용의 선구자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유럽, 남미, 미국 등 15개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세계적 무용가 반열에 오른 최승희의 대표 작품 '초립동'과 '검무 격'은 안나경 무용가, 쟁강춤은 북한출신 최신아 무용가가 재현했다. 최승희는 현대무용 계열의 창작춤은 주목받지 못하다가 1934년 일본에서 조선풍 소재 창작춤을 발표하면서 대성공을 이루고 대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1937년 동경에서 초연된 '초립동' 춤을 1995년 김백봉이 새로이 안무한 작품을 안나경이 무대에 올렸다. 신명나는 밀양아리랑 선율에 맞추어서 빠른 템포로 추었는데, 허공에 들었다 났다하는 발동작을 앙징맞게 연출하며 누나같은 색시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천진난만한 어린 신랑의 모습을 자연스레 연출하면서 큰 박수를 받았다. 최승희의 상장적인 춤이라고 하는 쟁강춤은 북한무용을 대표하는 무용이다. 최승희의 쟁강춤은 무희춤이라고 불리는데, 최승희의 '무희' 춤을 바탕으로 여러 명의 무용수가 나오는 군무이기 때문이다. 쟁강춤은 손목에 '쟁강, 쟁강' 소리를 내는 쇠팔찌를 걸고 흥겨운 리듬을 울리면서 추는 춤이며, 본 작품은 지난날의 '쟁강춤'을 현대적 미감에 맞게 재형상하여 훌륭한 무대 예술 작품으로 완성한 특색있는 춤이다. 북한출신 최신아 무용가가 최승희 직계 제자답게 시원시원하게 보여 주었다. 1987년 파바다가극단에서 최승희 직계제자 김응범 선생에게서 쟁강춤을 배웠다. 남한 지역 전통 춤사위는 대개 느린 템포로 정중동을 표현한다. 여기에 북한 춤사위는 러시아 예술의 영향으로 남한보다 훨씬 빠른 템포를 유지한다. 한 시간이 넘는 무대를 남한춤만 채우기보다는 북한춤도 함께 보여주면 음악적 바란스가 안정적이라고 본다. 무대는 지루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외동포들에게 전통 춤사위만 보여준다면 러브콜이 없는 무대로 기억될 것이다. 2019년 러시아 사할린아리랑제 무대에서 최신아가 선보인 쟁강춤으로 러시아 동포사회와 시민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오늘 무대에서도 연기력이 뛰어난 최신아는 쟁강춤을 완벽하게 선사했다. 그 댓가로 우뢰와 같은 관객의 박수를 선물로 받았다. 검무 격(格)은 검무는 신라 시대 때부터 만들어져 내려오던 검무를 모티브로 1934년 창작된 최승희의 대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검무가 원형을 잃어버리고 검의 움직임만을 주로 담은 섬약한 모습 무사(武士)의 검무, 즉 검술의 무도정신을 이어받은 움직임들로 창작했다. 작품 '검무_격格'은 김백봉이 최승희의 원작 '검무'를 1995년 격(格)이라는 부제로 안무 발표한 작품이다. 무예를 닦는 무인의 기백과 그 속에 깃든 기혼(氣魂)의 이상경(理想境)을 하나의 격의 경지로 표현했다. 안나경은 최승희의 춤사위를 체화하고 자신있게 보여주었다. 신라를 상징하는 금관악기와 금색이 도는 금으로 만든 신발 등 화려한 금색 치장은 신라에서 숭상하는 검을 숭상하는 검도정신을 춤으로 형상화했다. '조택원의 가사호접(袈娑胡蝶)'을 국수호가 재현했다. 전문가에 의하면 그 시설 조택원의 춤사위를 잘 표현했다라고 평했다. 원로 무용수답게 완숙한 선과 호흡을 선사하여 기장 큰 박수를 받았다. 조택원의 가사호접(袈裟胡蝶)은 조택원이 1935년 경성공회당에서 가진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초연 당시의 제목은 '승무(僧舞)의 인상(印象)'이었으나 이후 시인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창작춤을 위해 처음으로 음악을 작곡한 작품이었고, 작곡은 김준영이 맡았다. 작품은 속세를 동경한 승려가 심산유곡을 버리고 새벽녘에 사바세계로 내려오며 시작된다. 가사를 벗어 던지고 환희와 광란의 춤을 추던 승려는 지쳐 쓰러져 생각한다. 불교에 의지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다시 가사를 집어 들고 산에 가려 해보나 이미 파계승이 되어 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도,뒤로도 갈 수 없는 승려는 가사를 집어 던지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가사호점은 승려의 파계와 귀의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희열을 한국의 춤사위로 표현하고 있다. 조택원의 만종'을 김형남·김호은이 재현했다. 만종이라는 명화를 재해석하여, 신선한 스토리를 상상하게 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춤사위가 아름다웠다. 남과 여의 호흡이 잘 어울어져서 펼쳐지는 큰 원 속에서 마치 두마리 나비가 사랑을 찾아서 희롱하는 모습은 객석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조택원의 만종은 19세기를 풍미한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만종'과 프레데리크 쇼팽의 '야상곡'에 영감을 얻어 창작된 2인무다. 조택원의 집 2층에 살고 있던 음악가 김생려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 엘만이 피아노곡을 바이올린곡으로 편곡한 쇼팽의 '야상곡'을 밤낮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연주를 듣던 조택원은 마침 방에 걸려있던 밀레의 그림 '만종'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만종은 1935년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조택원의 제2회 신작무용발표회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부부가 '야상곡'에 맞춰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비길 데 없는 평화와 고요, 비현세적인 경건함과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신비가 조택원의 머리에서 춤을 추었고, 상상을 실현하여 작품 '만종'이 창작되었다. 한편 9일에는 신무용 2세대 김진걸·김백봉·최현·황무봉·최희선·송범의 작품을 정민근·안귀호·정혜진·김혜윤·윤미라·손병우·김장우·최영숙이 선보인다.11·16·18·23일에는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새로운 한국춤을 모색했던 1970년대 이후의 한국 창작춤을 만나볼 수 있다. 무용 전문 조직체와 교육기관이 설립되며 더욱 다채롭고 창조적인 춤이 등장했던 시기다. 당대를 대표하는 김매자·배정혜·국수호·문일지의 작품 등 창작춤 24편이 4회에 걸쳐 공연된다. 25·30일에는 한국 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컨템퍼러리 춤꾼들의 작품 12편이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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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전에 공헌을"…서울 사는 외국인 87명 韓국적 얻었다태권도를 사랑하다가 대한민국까지 오게 됐고, 마침내 한국 국민이 됐어요. 국적증서를 받게 돼 기쁘네요. 한국인으로서 한국 발전에 조금이라도 공헌하고 싶어요." 콜롬비아 출신 한국 영주권자인 호르헤 페냐(34) 씨는 28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2024년 제3회 대한민국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한국 국적을 얻은 소감을 밝혔다. 그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 문화와 잘 맞아 더 오래 살고 싶어서 여러 방법을 찾다 보니 국적까지 얻게 됐다"며 "한국인으로서 가정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콜롬비아국립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페냐 씨는 대학 시절인 2011년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1년간 계명대 한국어학당에서 유학했다. 이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졸업한 뒤 2014년 충남대에서 6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후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글로벌 교육기업 에듀케이션퍼스트(EF) 한국 지사인 EF코리아에서 재무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주로 유학, 어학연수, 교환학생 프로그램 등과 관련한 회계 업무를 담당한다. 페냐 씨는 "콜롬비아에서 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한국에서는 활용이 어렵다"며 "향후 미국 회계사와 한국 회계사 자격증에도 도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법무부 서울출입국·외국인청(청장 배상업)은 이날 국민선서자 대표 페냐 씨를 비롯해 귀화자와 국적회복자 등 서울 지역에 체류하는 외국인 87명에게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일반귀화 28명, 혼인귀화 8명, 특별귀화 17명, 수반취득 11명, 국적회복 23명 등이다. 국적별로는 중국(47명), 미국(14명), 캐나다(7명), 베트남(7명), 카자흐스탄(4명) 등 순이다. 이들은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며 국민선서를 하고 한국으로서의 삶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러시아 출신으로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세계화랩 사업팀 책임연구원 표도르 테르치스키(한국명 이휘성·36) 씨도 이날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중학교 때 북한 관련 책을 읽고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그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석사 학위를, 서울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적증서 수여자는 1만4천548명(귀화 1만346명, 국적회복 4천202명)이다. 이 중 서울출입국청은 2천210명(귀화 952명, 국적회복 1천258명)에게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축하 영상에서 "여러분은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는 동시에 의무도 따른다. 무한한 성장과 기회의 땅에서 꿈을 마음껏 펼쳐나가길 기대한다"며 "한국은 물론 세계시민 모두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고 확대하는 데 기여해달라"고 말했다. 배상업 청장은 "뜻깊은 장소에서 국적증서 수여식을 실시하게 돼 기쁘다"며 "오늘날 번영하는 한국의 밑바탕에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애국자들의 헌신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한국을 위해 모범적인 시민으로 뿌리내려달라"고 말했다. 서울출입국청 관계자는 "한국 국적 취득의 중요성을 알리고, 귀화자 등이 국민으로서 정체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순국선열의 독립·애국정신이 깃든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처음 수여식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적취득자들의 소속감과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민족시인 윤동주 시비(서울 서대문구), 전쟁기념관(서울 용산구) 등 순국선열의 얼이 새겨있고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장소에서 수여식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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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국제음악제' 나래솔 "클래식 새로운 맥락에서 들어보세요"클래식 작곡가 10명의 스타일로 편곡한 생일 축하 노래, 방탄소년단 정국의 노래에 맞춰 클래식 음악을 작곡하는 법, 장난감 피아노 연주로 매긴 작곡가 순위…. 베토벤, 모차르트 등 고전 레퍼토리를 주로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이목을 끄는 이가 있다. 바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크리에이터인 나래솔(33·Nahre Sol)이다. 그는 유튜브에 클래식 음악을 흥미롭고 새로운 시각으로 소개하거나 피아노 연주력을 향상할 수 있는 연습법 등을 담은 콘텐츠들을 올린다. 구독자가 70만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다. 나래솔은 올해 처음으로 통영국제음악제에 참가해 한국 관객들을 만난다. 그는 다음 달 6일과 7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에서 '오픈 보더스'(Open Borders)를 주제로 공연한다. '열다'(Open)와 '경계'(Borders)라는 상충하는 듯한 개념을 결합한 이번 공연은 그동안 나래솔이 장르를 넘나들며 구축해온 음악 세계를 보여준다. 나래솔은 31일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새로운 청중과 만나 내 음악을 공유할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연에서는 바흐의 음악을 재즈, 블루스로 재해석한 '라운드 어바웃 바흐', 아르헨티나 탱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퍼스트 탱고', 피아노와 전자악기를 사용한 여러 가지 양식의 즉흥연주 등을 들려준다. 나래솔은 "저는 경험과 새로운 해석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새로운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을 좋아한다"며 "오늘날 음악가들이 장르, 문화, 시대를 넘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도록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여는 공연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공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통과 혁신의 '혼합'으로 고전과 동시대, 동양과 서양이 만나게 된다"며 "관객들은 서로 섞이지 않은 형태의 음악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실제 나래솔의 음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튜브 콘텐츠에는 클래식 음악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넘쳐난다. 대표적으로 클래식 작곡가 10명의 스타일로 편곡한 생일 축하 노래는 나래솔이 직접 곡을 편곡하고 연주한 콘텐츠다. 바흐 버전은 교회 음악 느낌이 물씬 풍기고, 리스트 버전은 극적인 효과가 돋보이며, 드뷔시 버전은 차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영상에 대한 반응도 "편곡이 아니라 원래 작곡가들의 곡 같다", "한 학기에 배울 음악 이론을 20분 만에 마쳤다" 등 폭발적이다. 나래솔은 이런 콘텐츠를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해 "음악에 대한 저의 사랑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면서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기 위한 아이디어들"이라며 "사람들에게 친숙한 선율과 오늘날의 주제를 활용해 (클래식 음악과의) 유사성이나 다채로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런 콘텐츠들이 주목받으면서 나래솔은 지난해 6월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공연장 엘프 필하모니의 '상주 크리에이터'로 위촉됐다. 클래식 공연장이 작곡가, 연주자들을 상주 음악가로 두는 일은 흔하지만, '상주 크리에이터'는 클래식계에서는 낯선 영역이다. 나래솔은 상주 크리에이터가 된 데 대해 "지금까지 제가 해온 새로운 방식의 공연, 교육, 연주를 인정받는 느낌이었다"며 "굉장히 신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겸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상주 크리에이터는 '음악 작업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허무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음악과 예술이 살아있고, 진화하는 형태라고 믿어요. 과거의 풍부한 전통을 흡수하면서 현재의 혁신과 문화의 교류로 형태를 잡아가죠. 저는 저 자신을 그 연속체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과거의 유산과 현재의 가능성에서 영감을 받습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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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복희가 꽃피운 72년 무대 인생…미니스커트 입고 "여러분~"'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마치 심지가 '콱' 박힌 듯 옹골찬 목소리에 여든을 앞둔 나이가 믿기지 않는 '까랑까랑'한 고음이 이어졌다.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윤복희(78)가 뿜어내는 에너지에 관객은 숨을 죽인 채 압도됐다. 윤복희는 '만약 내가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라는, 대표곡 '여러분'의 유명한 마지막 소절을 읊조렸다. 그러고서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여러분!"하고 외쳤다. 그제야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윤복희는 지난 23일 서울 광진구 나루아트센터에서 연 단독 콘서트 '삶'에서 이 곡을 끝으로 72년 노래 인생을 혼신을 다해 풀어냈다. 여섯 살 때인 1952년 아버지가 연출한 공연에서 깜짝 등장한 이후 70년 넘도록 콘서트 혹은 뮤지컬로 관객 곁을 지켜온 그 다운 마무리였다. 윤복희는 때로는 익살맞은 표정으로, 때로는 노래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으로 한 곡 한 곡 정성을 쏟았다. 코러스 없이 오로지 자신만의 목소리로 80분 무대를 가득 채웠다. 그는 왼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박자를 탔고, 신나는 곡에선 스텝까지 밟으며 무대를 즐겼다. 국내 간판 재즈 색소포니스트 이정식을 필두로 한 재즈 밴드가 생생한 라이브로 흥을 돋웠다. 1946년생인 윤복희는 지난 1952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 중앙극장 악극단 무대에서 데뷔해 72년 동안 가수와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다. 그는 1963년 워커힐 극장 개관 무대에 초청된 루이 암스트롱 앞에서 모창한 것을 계기로 미국과 영국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1967년 발매한 첫 음반 재킷 속 미니스커트 사진으로 당시 패션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윤복희는 세련된 흰 블라우스에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등장해 '포 원스 인 마이 라이프'(For Once in my life)와 '이거야 정말'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윤복희는 '어 송 포 유'(A song for you)·'스위트 캐롤라인'(Sweet Caroline)·'싱'(Sing) 같은 팝,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웃는 얼굴 다정해도'·'나는 어떡하라고' 같은 가요를 망라하며 폭넓은 음악 내공을 선보였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를 부르는 도중 "왜 이런 가사를 만들었지?"라고 농담을 건넸고, '왜 돌아보오'를 들려주면서는 눈을 매섭게 뜨고 꼿꼿이 서서 '사랑한단 말을 마오'라는 가사로 깊은 감성을 전달했다. 그러다가도 분위기를 180도 바꿔 익살스러운 스텝을 밟으며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부르는 능청스러운 연기도 보여줬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그는 '아멘'(Amen)·'웬 더 세인츠 마칭 인'(When the saints marching in) 등 가스펠 멜로디도 선보였다. 이중 '웬 더 세인츠 마칭 인'은 61년 전인 1963년 그가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과 워커힐 개관 공연에서 듀엣으로 부른 곡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한 소절 한 소절 불러 나가는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윤복희는 이어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메들리에선 결연한 표정으로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그가 분출한 열정과 열기는 마지막 곡이자 최대 히트곡 '여러분'까지 이어졌다. 윤복희는 노래 한 곡 한 곡을 마칠 때마다 관객을 향해 90도로 인사했다. '여러분' 무대 도중에는 아예 객석으로 내려가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청하며 연방 "감사합니다" 혹은 "고맙습니다"를 반복했다. '나는 너의 친구'라는 '여러분'의 가사 그대로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1956년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무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여러분들께서 저를 믿어주고 밀어주신 덕입니다. 아니면 제가 어떻게 (뮤지컬에) 캐스팅되겠어요? 너무 고맙습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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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열의 ‘피아노 춘향(春香)’[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지난 3월 15일과 16일 이틀간,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고영열의 피아노 병창 ‘춘향(春香)’ 무대가 열렸다. ‘피아노 치는 소리꾼’이라는 타이틀로 유명한 고영열은 직접 작사, 작곡을 하고 피아노를 치며 소리를 하여 ‘피아노 병창’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클래식, 팝, 재즈, 월드 뮤직 등의 여러 장르와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으로 국악의 다양성과 대중성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JTBC ‘팬텀싱어 3’에서 ‘라비던스’의 멤버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대중들의 인지도를 높였으며, 이후 국내외 유수한 국공립 단체와의 다양한 협연 무대, KBS ‘불후의 명곡’, ‘열린음악회’, MBC ‘복면가왕’ 등에 출연하며 국악의 매력을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3월 21일, 앨범 ‘춘향(春香)’이 발매 될 예정이다. 고영열은 이 앨범에 대해 "피아노와 목소리를 동시녹음하며 제 혼과 춘향과 몽룡의 혼이 담겨있는 앨범”이라고 밝혔다. 또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제가 생각한 가장 의미 있고, 멋있는, 많이 알았으면 하는 대목들로 구성해 보았다’고 전했다. 앨범명과 동일한 이번 공연 ‘춘향(春香)’은 춘향가의 눈대목(판소리의 중요한 대목)을 한데 모은 앨범으로, 고영열이 선정하고 새롭게 재해석해 구성하였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춘향가를 직접 편곡해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래했으며, 80개가 넘는 춘향가 대목 중 대중적으로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대목의 선율과 가사에 특히 집중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따뜻한 봄 날씨가 싱그러운 주말, 남산국악당에는 많은 관객이 자리했다. 무대에는 피아노 한 대가 우직하게 덩그러니 서 소리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고영열이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본인이 피아노 병창을 하게 된 계기와, 이번 공연, 그리고 춘향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 후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고법을 함께 익혀, 어릴 적부터 스스로 북을 치며 소리를 공부해 나갔다고 한다. 더불어 피아노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소리를 얹는 작업을 하여, 자연스레 장단과 화성의 조화 가운데 소리를 연주하는 피아노 병창 소리꾼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이번 공연에서 노래에서 그림이 보여지는 판소리 ‘이면’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과연 그가 해석하고 그가 그려내는 춘향가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무대를 관람하였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과 함께 무대가 밝혀지고, 고영열의 목소리로 방자와 몽룡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그의 아니리는 일반 판소리 아니리와는 사뭇 달랐다. 마치 시를 읊는 듯 차분하고 잔잔하게 소리의 배경을 전하고, 이야기하며 따스한 감상을 끌어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피아노 선율은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따스한 봄 같았다. 아련한 옛사랑의 추억을 그리는 듯한 그의 무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약 70분간 고영열은 쉬지 않고 피아노를 치며 소리를 했다. 그의 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가사와 피아노의 조화로움, 그리고 집중도 높은 연기였다. 두 번째로 불린 ‘백백홍홍난만중(白白紅紅爛漫中)’은 낭만적이고 대중적인 피아노 코드와 선율이 덧입혀져 그 아름다운 가사가 더욱 도드라졌다. 하얗고 붉은 꽃이 만발하게 피었다는 뜻의 ‘백백홍홍난만중(白白紅紅爛漫中)’은 춘향이 그네 타는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되었다. 또 몽룡이 춘향이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아름다운 순간이 따스하고 사랑스런 피아노와 고영열의 음색으로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였다. 특히 ‘백백홍홍난만중’ 후렴구를 반복할 때에 반복적인 피아노 패턴을 다이나믹하게 변화 주어 연주함으로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그의 음악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곡 중 하나인 ‘사랑가’가 불렸다. 3박으로 구성된 왈츠 패턴으로 피아노가 발랄하게 연주되고, 그 위에 고영열의 고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봄의 왈츠가 연상되듯 리듬을 타다가도, 풍성한 피아노와 질러내는 소리의 반복에 집중력이 더해졌다. 특히 고영열 특유의 낮고 발라드틱한 목소리는 음악에 흠뻑 빠지게 해 주었다. 그는 사랑가를 부를 때 노래 속의 감성을 더 잘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감성은 그의 연극적 연기가 잘 덧입혀져 몽룡과 춘향의 사랑을 그의 감성으로 재해석해 냈고, 피아노 코드 진행과 노래의 기승전결을 달리 줌으로써 풍성하고 감성적인 음악을 만들어 냈다. 고영열은 피아노 반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앞서 경쾌하고 따스하던 사랑가가 끝난 후에 불린 ‘이별가’는 슬프고 아린 느낌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몽룡이가 떠나는 장면, 춘향이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라며 질러내는 부분은 그가 표현하는 슬픔의 감정이 마음 깊이 전해졌다. 이어 춘향이가 구슬프게 우는 부분은 소리의 전통적 어법을 활용한 구음으로 질러내 슬픔을 구사해 냈다. 이 때 왼손은 피아노의 패턴을 연주하고, 오른손은 연기하듯 뻗어냈는데, 마치 하나의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았다. 원래는 빠르고 경쾌한 장단으로 불리는 ‘돈타령’은 서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으로 편곡되어 고영열의 새로운 해석 기법이 돋보였고, ‘쑥대머리’는 하행하는 코드 진행을 통해 서정적이고 대중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피아노 연주 구성이 비슷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3박 왈츠 진행과 보이싱(피아노 연주에서 코드의 구성음을 배치하는 방법)은 거의 동일하여 뒤로 갈수록 새로움이 느껴지지 않았고, 같은 선율에 가사만 달리 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색다른 진행을 꾀한 곡도 있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대부분 뉴에이지 느낌의 서정성을 토대로 연주되었는데, 어떤 곡들은 재즈나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마이너(Minor)코드 진행에 이국적인 그루브를 겸하여 창의적인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 또한 모두 거의 동일한 분위기나 패턴으로 이루어졌고, 장단 요소나 전통 음악적 어법이 피아노에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더 다양한 패턴이나 새로운 화성/리듬적 요소가 가미된다면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무대보다 더 확장된 그만의 독보적인 음악이 되리라 생각한다. 소리꾼 고영열은 2020년 월간객석 인터뷰를 통해 ‘뿌리가 흔들리면 그 어떤 음악도 다양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도 계속 전통적인 판소리를 연구하고 연습한다’고 전했다. 다양한 음악 장르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들으며 그 모든 게 본인의 자양분이 된다고 밝힌 그의 이번 ‘춘향(春香)’ 공연은, 한 폭의 그림 속 동화 같은 춘향과 몽룡을 마주하듯 꿈결 같고 아름다웠다. 이 시대의 감성이 덧입혀져 새롭게 해석된 고영열의 춘향과 더불어, 앞으로 그가 새롭게 만들어 갈 우리 음악이 어떤 빛을 발하며 감동을 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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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한글서예가전 신인작가 이광호 작가의 시선봄바람을 타고 13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개최되는 네번째 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출품한 30명의 작가 중 가장 젊은 신인작가라고 한얼 회장이 소개를 한 3분의 작가 중 이광호(43세)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현재 젊은 3040세대가 담당하는 서예술의 현장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한 서예를 좋아하다가 대학에서 서예학과를 전공하고, 지금은 경기대학에서 서예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양시 화정동 화정캘리서예아카데미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Q. 이광호 작가님, 오늘 축하드립니다. 전통문화 '한글서예'를 향유하는 전승주체로서, 속도로 경쟁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라고 할 수 있는 서예술이 다음 세대에도 계승되어야 하는 '미래지향적 지속가능성'이란 화두를 가지고 바라본다면, 즉 서예 분야 전문인으로서 서예의 순기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A.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여 디지털, 인공지능, 로롯공학, 바이오 기술 등 AI를 활용한 다양한 시도를 통하여 신혁명의 시대를 맞이하는 요즈음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오늘날과 그리고 향후에는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되는 기술과 인간이어야만 할 수 있는 기술로 나뉘는 시대가 더욱 좁혀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붓을 쥐고 향유하고 있는 '서예'라는 순수예술은 인간 본연의 인성과 감성을 화선지에 녹여내리는 격조있는 독보적 예술 장르입니다. 모든 자연과의 어울림을 통하여 나오는 붓의 선질과 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현색(玄色)으로 형상화 할 수 있는 장르이지요. AI가 근접할 수 없는 분야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감성을 소통하고, 작가의 호흡으로 읽혀지고 감상할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예술 중 손꼽히는 최고의 예술이라 자부합니다. Q. 젊은 세대들만 모여서 활동하는 서예술 단체가 있나요? A.네. 경기대학교 서예학과, 계명대학교 서예학과, 대구예술대학교 서예학과, 대전대학교 서예학과, 원광대학교 서예학과 이렇게 5개대학을 졸업한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가 하나되어 2014년도에 결성한 '80후'(八零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저는 80후 단체에 장형(長兄)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015년도에 백악미술관에서 "동행”이라는 타이틀로 창립전을 하게 되었고, 올해에는 10주년을 맞이합니다. 80후는 문파와 학파를 무시하고, 오직 서예가 좋아서 하나가 된 단체입니다. 가볍지 않은 클래식한 전통서예를 지향하며 우리의 서예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맺어졌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젊은 청년층의 단체 중에 가장 큰 단체입니다. 전시는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주로 인사동과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10주년 기획으로 중국, 대만, 일본, 말레이시아에서 서예를 전공하거나 교수로 재직 중인 젊은 친구들과 한국 백악미술관 전관에서 국제서예교류전을 준비 중입니다. 전시 기간은 2024년 8월29일부터 1주일간 전시가 진행됩니다. Q.한얼 선생님의 작품활동에 대해서 느낀 점은? A.한얼 이종선 선생님은 제가 존경하는 우리나라 한글서예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선생님입니다. 고즈넉하고 단아한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는 예술세계를 펼치시며, 결코 가볍거나 기교를 통하여 보여지는 글씨가 아닌 글씨다운 글씨를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장에서도 뒤를 잇고 있는 후학들이 본받을 만한 흔적들을 풍부하게 남겨주고 계십니다. 우리나라 서예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마음가짐 또한 그동안 걸어오신 선생님의 행보에서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서예진흥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헌신해 오시고 애써 주신 선생님의 모습으로 서예의 저변확대와 우리나라 서예를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선생님의 노고를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직접 전하지 못한 말씀을 이곳에 남기게 되어 뜻깊습니다. Q. 이번 '아리랑특별전'에 참여하신 보람은? A.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우리나라 선조들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아리랑 가사에 담긴 문학성에 놀라웠습니다. 저에게 아리랑은 고향에 계신 어머님 품과 같습니다. 자식과 부모가 하나 되듯이 아리랑과 우리 민족은 하나인 듯합니다. 그리운 고향에서 들려주는 아리랑은 어릴 적 나를 마주하게 되고, 잠시나마 어머님의 품에 안기는 듯합니다. 이번 아리랑특별전을 통하여 관람객들과 함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따스함을 나누었습니다. Q.독보적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한글서예의 아름다움은 어느 부분인가요? A.우리나라 한글의 특성은 다양한 획과 자유분방한 선들이 하나되어 이루어진 화려하고 기교가 담긴 글씨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예를 통해 다양한 조형미가 완성된다고 봅니다. 우선 한글은 우리의 고유한 글씨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 남겨주신 한글의 해례본에서 이미 우리는 독보적이고 독창적인 하나의 국가가 완전하게 탄생하였음을 알리게 되었고, 선조들이 남겨주신 편지글과 한지에 담긴 조상의 얼을 통하여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한글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를 잇는 후학으로서 마땅히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딱딱한 펜과 연필이 아닌 붓으로 하여금 우리의 감성을 화선지에 표출하고 선조들께서 남겨주신 유산을 지켜낼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예술 중 한글서예는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작가는 "요즘 세상에 비인기 종목 서예를 하면서 밥 먹고 살기 힘드는데,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아서 서예를 업으로 삼고 결혼도 하고 살게 되어 행복하다" 이어 "올해는 이즘한글서예협회 신임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심사를 거친 통과의례입니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초등학교 3학년에 처음 잡은 붓을 이 날까지 계속 잡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서예진흥법이 활성화 되어 서예를 경험할 수 하는 어린이가 확대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광호 작가 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고양시 미술협회 서예분과 위원장 경기대학교 서예학과 겸임교수 한국서예학회/한국서학회/한국서예가협회/한국청년서단/이즘/80후 임원.회원 화정캘리서예아카데미 主宰 이즘한극서예협회 신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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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소리꾼' 고영열 "판소리 '춘향가' 특별한 색깔로""전통 판소리 '춘향가'가 오래된 산수화라면, 피아노 병창 '춘향'은 그 산수화 위에 물감으로 색을 입힌 거죠." '피아노 치는 소리꾼' 고영열(31)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판소리 '춘향가'를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준다. 15일과 16일 공연기획사 예술숲 주최로 서울남산국악당에서 공연하는 피아노 병창 '춘향'(春香)에서다. 이번 공연에서 고영열은 '춘향가'를 직접 편곡해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래한다. 이 곡은 오는 21일 앨범 발매도 앞두고 있다. 고영열은 공연을 앞두고 15일 연합뉴스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춘향가'의 눈대목(판소리의 중요한 대목)을 한데 모은 앨범"이라며 "피아노 위에 전통 소리를 얹고, 각 (대목의) 분위기를 새롭게 해석·편곡했다"고 새 앨범을 소개했다. 이어 "'춘향가'에는 80개가 넘는 대목이 있다 보니 알려지지 못한 것들도 많다"며 "많은 분이 알지 못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대목들의 선율들, 멋진 가사들을 꼭 들려드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춘향가' 대목 중 '백백홍홍난만중', '박석치'를 들려드리고 싶었다"며 "가사와 묘한 멜로디에서 오는 고풍스러움이 감동을 줄 것"이라고 귀띔했다. 완창할 경우 8시간에 달하는 판소리 한 바탕을 편곡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고영열은 "기쁜 멜로디에서 슬픈 가사가 나온다거나 표면적으로 빠르다고 해서 신나는 대목이 아니란 점 등 판소리를 해석하는 데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많아 힘들었다"며 "모두가 아는 '춘향가'인 만큼 특별한 색깔로 더욱 깊이 있게 해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선율로만 이뤄진 우리 음악에 화성을 입혔다"며 "앨범 작업 때 피아노와 목소리를 동시에 녹음해 피아노 현들이 목소리 배음에 반응하며 생기는 묘한 매력을 담았다"고 자랑했다. 어렸을 적 수영선수를 꿈꾸다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판소리를 시작했다는 고영열은 2014년 국악 인재들의 등용문인 온나라 국악경연대회에서 판소리 부문 금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2015년 판소리를 피아노 연주와 함께 선보이며 '피아노 병창'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제시했고, 2020년 JTBC '팬텀싱어3'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춘향가' 중 '사랑가'를 열창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고영열은 "제가 쓰던 연습실에 피아노가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에 앉아 판소리 연습을 했다"며 "'내가 소리 내는 음은 무슨 음일까'란 생각으로 피아노를 한 손가락씩 눌러보던 게 언젠가부터 열 손가락으로 연주하며 소리를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가장 한국적인 노래를 부르며 피아노를 치니 피아노가 스스로 국악기처럼 한국적인 선율에 대응한다"며 "소리꾼이 피아노를 직접 치니 한국적인 박자도 더 잘 살릴 수 있는 것 같다"고 피아노 병창의 매력을 꼽았다. 고영열은 피아노 병창뿐만 아니라 클래식, 팝, 재즈 등 여러 장르의 음악가들과 협업하며 국악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지난달에는 소프라노 박혜상 리사이틀 무대에 함께 서기도 했다. 국악 대중화에 남다른 사명감이 있냐는 질문에 고영열은 "사명감보다는 그저 그것이 제 꿈"이라고 답했다. "대중화라는 말이 부끄러울 때가 있어요. '우리의 것을 우리가 모르면 어느 누가 사랑할까' 생각해요. 많은 이들이 한국 음악을 한 번은 더 들어볼 수 있게, 사랑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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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살 수 있게 해달라" 성읍민속마을 주민들의 호소편집자 주=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이 있던 정의현성의 중심마을이다. 과거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하나다.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전통 초가 등 제주의 옛 모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1984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이후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주민들이 초가집에 거주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지만, 보전과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오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 원형 보전이라는 가치와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는 불편이 오랜 기간 쌓이고 쌓여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의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난 2차례 연재에 이어 살펴본다. ◇ 문화재 보전, 정주여건 개선 놓고 갈등 지난 2월 23일 오후 찾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제주성읍마을의 한 초가집. 10평(33.05㎡)이 조금 넘는 작은 초가에 90세 넘은 할머니가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상방(마루)엔 각종 살림도구가 가득해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앉을 만한 공간이 여의찮아 할머니는 구들방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00년이 채 안 된 초가집은 겉으로 보기에도 너무나 위태로웠다. 천정과 외벽은 바름흙이 벗겨져 떨어져 나가 서까래와 벽체가 훤히 드러났고, 다 낡아빠진 외마디 나무기둥이 위태롭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전선이 지붕을 따라 그대로 노출돼 있어 단락(합선) 등으로 인한 화재 위험에도 매우 취약해 보였다. 초가집 안으로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내부에 목욕탕과 화장실을 만든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길게 연결해 입구 근처에 대야를 받아 생활용수로 쓰고 있었다. 가까스로 가스레인지를 상방에 두고 음식을 내부에서 해 먹을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2024년도에 이렇게 산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주인 할머니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인근의 또 다른 초가집은 일주일 넘게 비가 이어지자 방안으로 비가 새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지붕에 방수용도의 비닐을 씌우고 그 위로 다시 새(억새의 일종인 '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덮었지만 그런데도 비가 새는 걸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예전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줄줄 떨어져서 방에 물이 벙벙해졌다"는 집주인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지붕에 비닐을 씌울 땐 초가지붕에서 굼벵이 수십마리가 떨어져 나왔다고 했다. 볏짚이나 썩은 나무, 톱밥, 부엽토 등 식물질을 먹고 자라는 굼벵이의 특성상 초가지붕은 굼벵이가 살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읍민속마을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 이유는 한 가지다. 자기 소유의 주택임에도 마음대로 증·개축을 할 수 없는 등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성읍민속마을이 지난 1984년 6월 12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마을 내 초가집 외관을 변경하거나 수리하려면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따라 현상변경 허가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가 다소 복잡하고 까다롭다. 예를 들어 주민이 화장실이나 욕실 용도로 초가집을 증축하려고 하면 우선 관할 지자체인 서귀포시에 신청해야 한다. 그러면 시는 다시 제주 세계유산본부에 요청하고, 세계유산본부는 재차 문화재청에 요구해 허가받는다. 원칙적으로 30일 안에 허가가 나와야 하지만 현장실사 등 추가 절차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더 오래 걸린다. 또한 싱크대 또는 냉난방 시설 등 경미한 현상변경도 지자체 차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주민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윤식 성읍1리장은 "부엌을 늘리려고 해도, 화장실을 만들려고 해도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내 집인데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며 "얼마나 답답했으면 초가집을 2천만원에 팔고 인근 문화재 지정 구역 밖에 집을 새로 지어 이사했겠느냐"고 말했다. 김명호 전 표선면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은 "현상변경 내용에 따라 허가가 나오는 데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불편하고 까다로워 주민들이 일일이 허가받으려고 하지도 않고 결국 행정 몰래 불법 증·개축 등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문화재 보수, 건축은 일반 건축업자가 할 수 없고 허가받은 업체만 할 수 있어 평당(3.3㎡) 1천만원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일일이 허가를 받고 진행하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러한 탓에 지역 주민들은 초가집을 불법으로 증·개축해서라도 화장실과 욕실, 보일러실 등을 암암리에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상당수 주민들은 더는 초가집에 못 살겠다며 집을 제주도에 팔고 이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주민은 집을 팔고 받은 돈으로 다른 곳에 주택을 마련할 수 없자 마을 인근의 천미천 공원 부지에 컨테이너 가건물 등을 지어 생활하기도 한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에 따르면 현재 제주성읍민속마을 지정구역 79만4천213㎡ 내 등록가옥은 306가구 1천305동이다. 이 중 초가는 정의현성 안에 있는 일명 '성내'(城內) 77가구 260동, '성외'(城外) 158가구 674동이다. 주민이 떠나가면서 제주도가 매입한 초가는 44가옥 109동이다. 제주도는 증·개축 등으로 인한 마을 내 불법 건축물이 870여동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상 90% 넘는 대부분의 초가가 원형을 잃고, 외형·구조·내부 변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오랜 기간 생활 불편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주민을 탓할 수도 없다. 제주도는 해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환경개선을 하고, 지난 2022년부터 소유주의 신청을 받아 불법 무허가 건축물에 대한 철거 등 정비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는 게 지역 주민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지난 40년간 주민 편의는 고려하지 않은 채 초가 원형 보존이라는 원칙만을 강조한 나머지 과거의 옛 정취와 전통경관도 잃고 주민도 떠나가는 특색없는 민속마을로 전락해가는 셈이다. 김철홍 전 성읍1리장은 "성읍마을 내 초가집 평수가 12∼15평(39.7∼49.6㎡) 정도다. 일반적인 국민주택 수준은 25평(82.6㎡)이다. 사람이 사는 민속마을로 지정했으면, 적어도 사람이 가족을 이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초가는 사람이 살면서 손때를 타야 수십년, 100년이 지나도 끄떡없이 보전되는 것"이라며 "훼손 가옥을 정비하는데 수많은 돈을 들이며 낭비하기 보다 주민이 마을을 지키며 예쁘게 가꾸며 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윤식 현 성읍1리장은 "사람들이 떠나간다. 젊은 사람은 다 떠나고 늙은 사람들만 남게 됐다. 옛날 학교 다닐 적 한 반에 50∼60명 했던 성읍초등학교 전체 학생 수가 이제 60명이 안 된다. 이러다 학교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해마다 이주자로 인해 발생하는 빈집이 3∼4채씩 꼴로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관계자는 "현재 복잡한 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받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 자문단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며 "최대한 마을 주민 입장에서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문화재청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3월부터 성읍마을의 체계적인 보전·정비사업 추진방향을 재정립하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성읍마을 제3차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중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담아 진행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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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함성 잊지 말자"…내일 경기도 곳곳서 삼일절 기념식29일 각 지자체 등에 따르면 경기도는 1일 오전 11시 수원 경제과학진흥원에서 '그날의 함성, 미래의 희망으로'라는 주제로 3·1절 기념식을 연다. 이날 행사는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김호동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을 비롯한 시군 지회장, 남경순 경기도의회부의장, 도내 유관기관·보훈단체장과 도민 대표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영상 상영,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유공자 등 표창, 기념공연,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경기도 어린이와 귀화 외국인 일리야 벨리코프가 인터뷰 형식으로 3·1절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내용의 기념 영상을 상연한다. 매년 광복회 지부장이 의례적으로 낭독하던 독립선언서를 이번 행사에서는 초등학생, 청년, 장애인, 귀화 외국인, 노인 등 모든 세대가 함께 낭독한다. 시각장애 국악인 최예나 씨가 부르는 진도아리랑과 한국무용이 어우러진 기념공연도 마련돼 있다. 초등학생들로 구성된 30여명의 '기회기자단'도 참석해 취재 활동을 한다. 화성시는 오전 10시 모두누림센터 누림아트홀에서 정명근 시장과 광복지회장, 보훈단체장, 독립운동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을 한다. 기념식은 국민의례와 독립선언서 낭독, 기념사, 삼일절 노래 제창, 기념 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3·1절 기념식 후 오후 2시부터는 화성시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역사토크콘서트가 이어진다. 이번 토크콘서트는 대표적인 역사 강사인 최태성 씨가 1919년 화성지역 독립운동을 시민들에게 생생하고 흥미롭게 전달할 예정이다. 특히 격렬했던 화성지역의 독립운동이 가진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가슴 아픈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된 과정 등을 소개한다. 용인시도 오전 11시부터 시청 에이스홀에서 보훈단체, 독립유공자 및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을 연다. 양주시는 광적면 가래비 3·1운동 기념공원에서 '제105주년 양주 가래비 3.1운동 기념식 및 재연행사'를 한다. 가래비 3.1 운동 순국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행사는 3.1운동 당시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희생한 백남식, 이용화, 김진성 열사 등 애국지사의 숭고한 희생과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열리고 있다. 재연행사는 당시 상황에 맞는 복장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가래비 3.1운동 기념공원을 거쳐 승리교 사거리를 지나 다시 공원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뤄진다. 행사에는 강수현 시장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유족, 보훈단체 관계자, 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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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체감할 혁신 주문했지만…문체부 소속·공공기관장 공석 7곳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다수 소속·공공기관의 리더십 공백이 심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문체부에 따르면 이달 기준 기관장이 공석인 곳은 국립중앙도서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정책방송원 등 소속기관 3곳과 한국관광공사, 예술경영지원센터,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저작권위원회 등 공공기관 4곳까지 모두 7곳이다. 또한 다음 달에는 공공기관인 영상물등급위원회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기관장 임기도 만료된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확대기관장 회의를 잇달아 열어 국민이 체감할 혁신과 적극 행정을 주문했지만, 기관별 현안과 정책에 속도를 낼 리더십 부재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문화재청을 제외하고 문체부 소속기관은 18곳·공공기관은 31곳으로, 일부 기관장 공석이 된 배경과 임명 절차는 조금씩 다르다. 한국관광공사 김장실 전 사장과 한국정책방송원(KTV) 하종대 전 원장은 4월 총선 출마를 위해 3년 임기를 절반도 못 채우고 지난달 조기 퇴임했다. 관광공사 사장의 경우 공사 임원추천위원회 공개모집과 심사를 거쳐 문체부 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관광공사에 따르면 현재 임원추천위는 구성했지만 후보 등록 절차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경력 개방형 직위인 한국정책방송원장은 이달 인사혁신처에서 공모 절차를 진행 중이다. 국립중앙도서관장은 서혜란 전 관장의 임기 만료 이후인 2022년 9월부터 1년 6개월째 공석이다. 역시 개방형 직위로 2022년 6월과 12월, 2023년 6월 세 차례 공모를 진행했지만 적격자가 없어 임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체부의 설명이다. 국립민속박물관도 1월 김종대 전 관장의 임기가 만료됐다. 문체부는 지난해 6월 임명한 한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과 같이 개방형 직위인 민속박물관장을 내부에서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민속박물관장은 이전에도 내부에서 임명된 사례가 있다. 문체부 담당자는 "박물관마다 전문 분야는 따로 있지만, 전시·보존처리 등 공통적인 업무 분야에 대해선 교류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내부 임명을 하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저작권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문체부 장관이 위원을 위촉하고, 위원 간 호선으로 위원장을 선출하게 된다. 영진위의 경우 박기용 전 위원장 임기가 1월로 끝나 김선아 부위원장의 위원장 직무대행 체제가 됐다. 영진위는 임기 3년의 9인 위원 체제로 구성되는데, 박 전 위원장을 포함해 임기가 끝난 위원은 2명이다. 신임 위원을 위촉해야 위원장을 선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문체부 영상콘텐츠산업과 관계자는 "관련법상(영비법) 영진위원은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계속 임기를 수행하게 돼 있다"며 "다만, 박 전 위원장의 개인 사정상 직무대행 체제가 됐으며, 다른 한 분은 임기를 이어가고 있다. 공백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는 9인 위원의 임기(3년) 만료 시점이 같아 3월 새롭게 위원회를 꾸리고 위원장을 선출할 예정이다. 유 장관은 연초 '수장' 공석이 되는 기관이 늘어나는 데 대한 우려를 인식하고 역량 있는 적임자를 찾는 데 고심해왔다. 그는 지난해 12월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도 "새 기관장은 전문성과 현장성, 역량을 갖춘 적임자가 임명되도록 고심 중"이라며 일부 기관의 경우 특수성을 감안해 기관장 선임 방식과 대우를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유 장관은 또한 일부 기관의 조직과 업무가 확대됨에 따라 전반적인 문화예술 분야 조직과 역할에 대한 고민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체부 운영지원과 관계자는 "예컨대 예술경영지원센터는 과거보다 예산 규모와 사업 범위가 커졌다"며 "변화된 기능까지 고려할 때 적합한 인물을 찾아야 하고 내부 인사까지 고민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측면이 있다. 후보 검토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각 기관의 (기관장 임명) 기본 절차가 상이하다"며 "공백을 최소화하도록 최대한 빨리 임명 절차를 진행하려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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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3)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용과 용둠벙"용 같지 않은 용은 때려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아픔을 다듬어주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그런 철학을 가진 이들을 마땅히 등용시켜야 진정한 용의 해일 것이다. ” 지난 설날 광주교통방송 아침 인터뷰를 했다. 올해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이니 남도의 용을 설명해 달라는 취지였다. 갑진년 양력설 본 지면에 ‘용보다 소사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남도의 용을 소개한 바 있는데 종종 질문해오는 사람들이 계시기에 답변 삼아 다시 언급한다. 갑진(甲辰)은 60갑자 중 하나다. 우리 조상님네들은 세상의 주기를 60년으로 계산했다. 하늘의 수 천간(天干) 즉 10간과 땅의 수 지지(地支) 즉, 12지를 서로 교직시켜서 최소공배수인 60을 만들었다. 갑자년, 을축년 등으로 조합해 열 번이 끝나면 10간의 첫째를 12지의 열한 번째부터 조합해 순환하는 방식이다. 갑진년(甲辰年)의 갑(甲)이 육십갑자 41번째인 푸른색을 뜻하고, 땅의 수 진(辰)은 용을 뜻하기에 청룡의 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용이 청색인 것은 아니다. 동서남북 방위를 설정할 때 동쪽을 담당하기에 그리 구분하는 것이지, 우리 사상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오행(五行)의 중심은 오히려 황룡(黃龍)이다. 용 자체가 상상 속의 캐릭터라 어떤 근원으로부터 변화하면서 생성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존재한다. 인간 욕망의 투사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용(龍)을 dragon으로 번역하고, 동양에서는 dragon을 용(龍)으로 번역한다. 서양에서는 용을 악마화하고 동양권에서는 용을 최고의 권좌, 가장 권위 높은 캐릭터로 상정한다. 용을 바라보는 시선이 극단적이다. 힌두교의 나가(Naga)도 용이다. 코브라처럼 생긴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동양권의 용 중에서는 지렁이도 토룡(土龍) 곧 용이다. 견훤 탄생설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문화권, 문명권별로 용이라는 캐릭터를 서로 다르게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남도에 용(龍) 관련 지명이 전국 대비 가장 많은 까닭용 관련 지명은 전국에서도 광주 전남지역이 가장 많다. 올 초 전라남도가 조사를 한 모양인데, 전국 1,261곳 중에서 310곳으로 25%를 차지한다. 전국 최고다. 아마 마을 이름이나 산 이름 정도를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지명총람>의 광주전남을 참고해보면 마을 이름, 산 이름, 강이나 하천 이름, 계곡이나 못 이름뿐만 아니라 바위, 산등성이, 둠벙에 이르기까지 천여 개가 넘는다. 조사에서 밝힌 바로는 순천이 가장 많고 해남, 영암, 무안, 나주 순으로 많다고 한다. 실제는 지금의 영산강 권역에 용 설화나 용 지명이 가장 많이 분포한다. 예컨대 전남지역에 보고된 74편의 용 설화중에서 영산강 유역 설화가 57%를 차지한다. 이중 대표적인 지명이 장성 황룡강이다. 용은 용 자체의 지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용소(龍沼), 용연(龍淵), 용지(龍池), 용담(龍潭), 등 이른바 ‘용둠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둠벙은 갱(坑)이다. 강 혹은 갱번이란 이름이 여기서 왔다. 한자의 뜻대로라면 용소는 늪, 용연은 연못, 용지는 연못이나 도랑, 용담은 연못이나 물가 정도이다. 모두 물과 관련되고 장차 용왕(龍王)의 뜻으로 확대되어 사해 바다를 관장한다. 당골의 노래에서 나타나듯이 동해는 청제용왕, 서해는 백제용왕, 남해는 적제용왕, 북해는 흑제용왕 등으로 호명된다. 물론 남도에만 용 이야기나 지명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가 다 그러하다. 예컨대 제주도의 용담(龍潭)은 천지창조 후 만들어진 것으로 전승되었다. 태초에 바다 한가운데서 한라산이 솟아올랐는데 백록담에서 큰 내(川)가 두 줄기 흘러내려 바다와 만나는 곳에 용연(龍淵)을 이루었다.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도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뜻을 깨치고 포교를 시작했다. 용담가(龍潭歌)는 물론 천도교(동학) 성전(聖典)인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여기서 나왔다. "용둠벙에서 전하신 가사(歌詞)”이다. 광주는 용봉동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반룡동과 봉곡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반룡이 반룡희주형(盤龍戱珠形-용이 구술을 가지고 논다는 뜻)풍수 명당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전남대에 편입되었다. 광주 어룡동은 어등산과 황룡강을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용진산, 복룡산 등의 이름 중 어등산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의미로 민화로 말하면 등용문(登龍門, 잉어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한다는 의미)의 산이라 할 수 있다. 황룡강의 하류에 있는 산이기에 어룡이란 이름이 생겼다. 그렇다면 왜 전국 대비 남도에 용 관련 지명이 가장 많을까? 전남설화 분포를 통해 언급했지만,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설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산강 문화권을 중심으로 고려 건국을 둘러싼 시기의 용 설화나 지명이 넓게 분포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황해도 해양세력이던 왕건이 전라도 토호 세력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할 당시에 지금의 영산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나는 적어도 영산강권역의 용 관련 지명이나 전설은 이 사건을 배경 삼고 있다고 생각한다.남도의 용은 왜 피를 토하고 떨어지기만 하는가?영산강의 시원이라는 담양 용소의 설화는 용이 승천하려다가 피를 토하고 떨어져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아기장수 설화에 대입해보면,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으니 왕건이 아니라 견훤일 것이다. 참고로 아기장수 설화는, 신분이 미천한 집안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장차 역적이 될 것이라 하여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본(異本)이 매우 많다. 순천시 주암면 운용 마을의 용소(용물소라고도 한다)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옛날 마을 처녀가 용둠벙에 가서 목욕을 하고 있다가 마침 옥황상제의 아들 용이 유배를 와있던 차에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마침내 승천하는 날, 하필 처녀의 친구가 용오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용은 떨어져 죽는다. 다른 지역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만, 왜 남도의 용은 피를 토하고 떨어져 죽어야만 했을까? 답변 대신 전남대학교 용둠벙 이야기를 전한다. 용봉동에 위치한 전남대학교의 용지(龍池)는 유기춘 당시 전남대 총장 등에 의해 1970년에 인공으로 조성되었다. 장차 승천할 용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남대 구성원들은 담양 용소 혹은 순천의 용 설화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용좌(龍座) 재구성을 상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용둠벙을 만든 지 한 갑자가 도래하는 지금쯤, 이 어간에서 대통령 한 사람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나? 어쩌면 수많은 용을 재구성하는 일을 담당했는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소풍 가는 날 하필 비가 오면 소사가 용을 때려잡아 그런다는 얘기는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다. 백마 타고 장흥 석대들을 지휘했다는 동학 여전사 이소사를 투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무리 영험한 용일지라도 가장 낮은 직급의 민중이 한 삽에 때려잡는 곳이 남도라는 메시지다. 그렇기에 나라가 어지럽고 힘들 때마다 떨쳐 일어나 시대를 이끌었던 곳이 광주이고 남도다. 문화는 어떤 시대 어떤 수요들이 있어 재구성되는 것이다. 마치 전남대 용지를 새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용좌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겠나? 지배해서 권력을 누리던 용은 전제정권 시대의 용이다. 우리 시대의 용은 백성을 섬기는 용이어야 한다. 장차 남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용 같지 않은 용은 한 삽으로 때려잡고,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아픔을 다듬어주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그런 철학을 가진 이들을 마땅히 등용시켜야 진정한 용의 해일 것이다. 용 관련 가보고 싶은 명소를 질문하기에 장성 입안산 황룡강 발원지를 소개했다. 극락강의 발원인 담양 용추산(용소), 드들강 발원인 화순 화학산과 더불어 세 개의 영산강 시원 중 가장 길다. 내려오다가 동학군 전승지인 황룡강전적비를 참배해도 좋다. 전설에 기대어 말하자면 남도의 용은 청룡보다는 황룡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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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윤치호 인정애국가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기원 또는 명칭일 수도 있고, 형태나 내용에 대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노래라는 점에서 전통성이나 전수 현상이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이런 과제와는 달리 의외적으로 우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배태된 작사자 문제가 걸려있다. 이는 역경의 근대사를 함께한 애국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노래의 유통과 전승이 아닌 익명성과 의례성으로 전승된 특성으로 하여 작사자 여하(如何)는 중요한 과제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기관인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반이란 기간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복구 중이 1956년 ‘국론분열을 우려하여’라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국가에서 공식화 하지도, 법제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잠복되었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문제는 90년대 들어 재론이 되었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 국가상징연구회 창립5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國歌 愛國歌에 대한 再檢討’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 프레스센타에서 개최한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연갑이 발표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에서 학술적으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정받았다. 그동안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譯述’의 해석 문제, 가사지의 ‘1907年 윤치호作’에 대한 오해, 이광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오류 등을 해결하였음은 물론,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신문 서재필 기록을 통한 ‘무궁화노래’의 윤치호 작사 확인 ②중앙대학교 안춘근(순흥 안씨)교수 발표 1904, 5년 필사 자료 3편의 위작 판명 ③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 결과 ‘윤치호 작사 확인’ 등의 성과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흥산단과 좌파계열의 진영논리로 윤치호 자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를 온전하게 인정하게 하는 데는 우선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더 면밀하고 자료와 해설로 설득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글 역시 이런 의도에서 그동안 작사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자료임에도 전체적인 조명이 도외시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사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얼마나 혼란이 격심했고, 그것의 해소가 얼마나 난문제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조사자료집’이지 ‘조사결과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연하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위하여 사전에 기본 자료를 취합하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한 것이지,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사자료 중에 "내용이 현행 애국가와 동일한 者의 有無如何는 未詳임”(1쪽)이란 표현 등을 오해하여 "조사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하였다”는 등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제1쪽의 서문격의 글, ‘애국가화창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의 종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총 54쪽의 프린트본(가리방)이다. 목차는 없고 1쪽부터 본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작사자 거론 5인을 적시하고 세 가지 설(說)을 제시하였다. 내용의 첫 문장은 "現行愛國歌作詞者로 論義 되고 있는 인물로는 尹致昊 安昌浩 崔炳憲 金仁湜 및 閔泳渙의 五人이고 또한 單獨作詞說, 合作說 및 改作說이 있다.”고 하였다. 합작설은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설이고, 개작설은 민영환의 작사를 김인식이 개작하였고, 그 후 안창호가 또다시 개작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작설을 제기했데,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안창호가 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때 거론된 인물은 5인이고, 이들 대상의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세 가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문헌과 신문 소재 애국가 기록을 3쪽에 걸쳐 인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편에 광무4년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 기록을 인용하였다. 한국법전 제2장 ‘의식’편에 1908년 애국가를 연주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그리스도신문(2회 인용)에 애국가와 황실가를 화창 또는 제창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전자는 8회, 후자는 2회 인용하였다. 문헌과 증언이 뒤석여 있다. 애국가의 종류 "애국가의 종류가 많았던 모양으로”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보를 인용하고, 김양선 목사와 장지영과 최남선의 증언을 수록했다.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국가 세 종류를 제시했다. 특히 1902년 학부(學部) 제정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애국가’와 관련한 기록과 위의 세 분의 증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 일부도 제시했다. 시선을 모으는 것은 이를 ‘애국가’가 아닌 ‘國歌’로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현행 애국가를 ‘국가’는 이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있었음을 알게 한다. 작사설 서론에서 밝힌 5인에 관련한 작사설을 1955년 5월 13일 이전까지의 신문 기사와 증언 등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민영환(2/1쪽), 안창호작사설(3쪽), 김인식작사설(1쪽), 최병헌작사설(1쪽), 윤치호작사설(6쪽) 순으로 관련설을 취합하였다. 윤치호 항목은 가장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윤치호설은 앞의 4인에서 제기한 설과 교차 검증을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다시 집중 분석을 하기로 한다. 부록 증보문헌비고와 한국법전 수록 애국가 기록과 독립신문 투고로 게재된 애국가 18편, 대한메일신보 잡보란 수록 무궁화가 2편과 애국가 수록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 ‘國歌調音’ 기사와 ‘대한제국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단행본으로는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본 창가책 인용 애국가를 수록하고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애국가(찬미가 제1장), 현 애국가 가사를 인용하였다. 한편 서북학회보 ‘西友’에서 "학부에서는 애국가 통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위원 중에는 학부협판 윤치호의 이름도 있다.”를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목록 21종의 참고문헌을 기록했다. 완조실록(王朝實錄-고종·순종 실기와 승정원 비서원, 규장각일기), 관보, 공사관기록, 독립신문 외 4종, 한국통사, 대한자강회보 외 2종 유년필독(幼年必讀 왜정시대 압수 책) 그리고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 손진태 편)이다. 의외인 것은 무가(巫歌)를 모은 ‘조선고가요집’이다. 이 시기 애국가를 수록한 해방 직후 발행의 노래책이 10여 종에 이르는데도, 이 같은 관계가 없는 무가집을 참고자료로 포함시켰다는 것은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5인에 대한 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5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중에 작사설 항목은 이 자료집의 핵심 주제로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영환부터 윤치호 작사설까지 살피기로 한다. 1. 민영환 작사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작사설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과 김동욱의 증언인데, 전자는 역사학자로 서울신문 1955년 4월 16일 자에 밝힌 내용이다. "거금 47, 8년 전 학생시대에 이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불렀다. 민영환 작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1908년에 들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부정확하다. 현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기에 들었던 시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영환 작사로 거론된 것은 1902년 학부에서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이다. 그러므로 장도빈은 현 애국가와 ‘대한제국애국가’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도 하였다. "당시에 안창호작 애국가를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는데 현행 애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안창호작’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거국가’인지 아니면 1908년 2월호 태극학보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찬 愛國歌’인지, 또 아니면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 자 기사 ‘大韓魂’에 포함된 ‘애국가’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안창호 작사 애국가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하게 하는 동시에 현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준 것이다. 김동욱의 증언은 출전이 없다. 조사자료를 꾸미는 과정에서 취합한 증언인듯하다. 당시 86세로 "기미년에 윤치호씨와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는 민영환에 틀림없다”(8쪽)라고 하였다. 이 증언 역시 1902년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와 혼동한 듯하다. 이런 오해의 배경은 이 애국가 악보 서문에 "大師府會計局總長陸軍副將 正一品勳一等 閔泳煥”으로 되어있기 때문인 듯하다. 2. 안창호 작사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작사설은 매우 관심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를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 출전이 제시되었다. ‘도산안창호’(1947. 5 30 刊)와 ‘도산안창호웅변전집’(1950 5 20 刊)으로, 여기에서 네 단락을 인용하였다. ①"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 부분을 ‘충성을 다하야’로 修正하였다.” ②"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넓리 불려져서 국가를 代身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自己의 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云云” ③"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對答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하지 않았다. 云云” ④"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十篇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 된 作品이라 云云”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은 모두 1947년 중반에 발행된 이광수가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것이 안창호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들 간의 교차 검증을 하면 다음과 같다. ①은 ‘신한청년’ 창간호에 게재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되어 나오니, 이를 안창호가 수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단 수정 시점이 창간호 발행 시점인 1919년 12월 이전이라는 단서가 충족되어야 한다. ②와 ③은 같은 맥락의 증언이다. 이 문제는 안창호가 언제 작사했는가와 왜 자신이 작사했으면서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느냐 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기된 안창호 작사 시기는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 윤치호 교장에게 안창호가 지은 것을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얻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역술 <찬미가>에 수록한 이후라는 문제가 확인된다. 여기에다 "왜 자신이 작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안창호의 겸양 때문이다” 또는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널리 전파시키려는 의도에서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있는 상태이다. 그 하나가 조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955년 4월호 ‘신앙생활’에 밝힌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의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 일제 압박 하에서 윤선생(윤치호)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자료에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광수의 두 번째 부인 허연숙(許英肅, 1897~1975)이 1955년 4월 20일 자 자유신문에 증언한 것으로, 윤치호의 딸이 이에 대해 問議해와 이광수가 설명하여 해득시켜 보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증언이 있다. 윤치호 작사설 자료에 수록된 주영환(朱榮煥)의 서면 증언이다. "이광수의 도산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출판 후 춘원은 안영자 씨를 통하야 訂正할 기회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광수는 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다 6,25 전쟁 혼란 와중에 납북을 당했다. 이런 상황임으로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로서 안창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은 윤치호 딸의 오류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증거력이 상쇄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족이나 친지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 측은 허영숙의 증언만을 거론하나 이 같은 대비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전기소설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인데, 앞장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에서 밝혔듯이 이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이미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되풀이하지만 이광수의 글이라면 이렇게 파편적이고 탈맥락적일 수가 없는 데다 ‘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이 생략된 사실에서와 같이 편집과정에서 가필과 삭제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어서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의 중장이 있다. 조사자료에는 두 가지 증언을 수록했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제기한 것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상해에서 안창호가 ‘임금을 섬기세’를 ‘충성을 다하여’로 改作을 하였을 때 자신에게 問議(9쪽)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같은 조사자료 같은 항목에서 최남선이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11쪽)이라고 지적을 하였다. 이는 주요한의 나이가 20세라는 점으로 보아 최남선의 지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의 ‘성자신손’(무궁화노래)을 ‘동해물과 백두산이’(애국가)로 개작하였다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대성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윤치호는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서 이런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낭설인 것이다. 다음은 최일봉(崔日鳳)이 서면(書面)으로 제출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의주 강연에서 안창호가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주었다 云云”이라고 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안창호가 임정시절 내무총장 비서실에서 "이유필(李裕弼) 입회하에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 하고 언명하였다. 云云”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의 진정성은 의문이 된다. 그리고 후자는 안창호설의 상투적인 주장이라 위의 김인서 목사 주장으로 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영숙 씨의 증언을 살핀다. 두 가지를 인용했다. 하나는 ‘도산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윤치호 측에서 이광수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득하고 돌아갔다는 것과 자신이 진명학교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하며 "도산이 作詞하야 愛蘭 민요곡을 부쳐서 부르다가 김인식 씨가 음악가로서 名聲이 있었으므로 作曲을 부탁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자는 앞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살핀 바와 같고, 후자는 문맥상 애매하여 논의 할 필요를 갖지 못하나 김인식설의 배경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인식 작사설 음악교육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 크게 관심을 둔 인물이다. 직접 직원이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고,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 1935~)이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인데, 하나는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여러 학교와 기관에서 지도한 음악가이고, 둘은 1955년 당시 작사설 거론자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다.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초기 상황에서 종횡한 음악가이다. 김인식은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고, 그 뒤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 스눅(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이후 바이올린과 코넷까지 배웠는데, 오르간 연주는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 1학년 음악수업을 맡을 정도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지도를 요청받고 교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부설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도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상에서 애국가 작사설의 인물로 시선을 끌만 하였다. 조사자료에는 1908년에 진명여학교 창립기념에 쓰기 위해 ‘애국가’란 제목으로 작사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박서양(경성합창단 단원)이란 학생이 부르는 ‘성자신손~ 운운’하는 "皇室歌(作者不明)를 듣고 이것에서 힌트를 얻어 작사·작곡을 하여 기념식에서 불렀고, 그 후 기호학교에서도 가리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7년 후에 작고하였음에도 작사자로 제외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1998년 발간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상술하였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1907년을 전후한 당시 윤치호와는 YMCA 활동과 한영서원 하기 음악강습 교사 활동, 그리고 종교교회와의 관련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 둘째, 1910년 경신학교 교사 재직 시 <보중친목회회보> 창간호에 발표한 <애국가>가 무궁화가 가사에 자신이 작사한 것을 더하여 ‘올드랭 사인’곡으로 발표하며 ‘김인식 작사’로 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현 애국가가 아니라는 점. 셋째, 이 같은 사실을 생존 시에 밝히지 않았다는 점. 넷째, 작사자조사위원회의 출석 증언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점. 마지막은 남긴 일기에 "찬송가에 손을 얹고 작사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일기를 쓴 일자가 작사자 조사 직후라는 점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외 김인식설에는 김한규 고유상 홍만유, 그리고 당시 진명여학교 학생 3인의 증언도 있다. 이는 모두 ‘김인식 작사’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김인식 작사의 다른 작품들과의 혼동에서 결과한 것이다. 한편 증언자 중 출판인 회동서관(淮東書館) 사장 고유상(高裕相)이 관심을 끌지만, "김인식 작 창가책 소형이 있었다”는 단순한 증언일 뿐이었다. 실제 김인식 명의의 악보집과 창가책과 악전(樂典)이 있지만 거기에 애국가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김인식 작사로 발표된 애국가(KOREA)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KOREA)는 8·6조 시형에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같은데, 노랫말을 의외로 두 부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후렴)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총 4절에서 1, 2절은 김인식 작사이고, 3, 4절은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3, 4절이다. 이 1, 2절을 언제 작사하여 재구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윤치호가 ‘찬미가 제14장’(현 애국가)을 작사한 1907년 중반 이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다시 밝히겠지만 화가 김은호의 회고록 ‘書畫百年’에 윤치호 작사 증언 부분에서 김인식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것이 확인된다. ‘예술통신’ 1947년 2월 10일 자 ‘愛國歌 其二’로 나오는 것은 물론 몇몇 필사본에도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확인하듯이 김인식은 당시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가’에다 가사를 더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증언을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가로서, 생존 인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4. 최병헌 작사설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위 ‘윤치호·최병헌 공동작사설’의 인물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최병헌 항목에는 최황(崔晃) 등 가족 2인의 명의로 제출한 자료가 요약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05, 6년 경 정동 자택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작사했다. ②윤치호와는 독립협회 때부터 친교, ‘황실가’ 후렴을 빌려 ‘하나님이 보호하사’ 애국가를 작사했다. ③윤치호는 기독교인이 아님으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 ④윤치호는 최병헌의 권유(勸誘)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작고 28년 후의 후손들이 제출한 자료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같은 내용은 어불성설이다. 윤치호는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으로 최병헌 보다 입교가 12년이 앞선다. 최남선이 이를 교정시켜 주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 시기 최병헌은 주사직에 있었다. 가족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이를 견준다면 앞의 두 가지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도 있다. 12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후 위의 인물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여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년 만인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을 하려 했다. 이에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YMCA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작사자에 대한 코멘트를 할 만한 동시대 지식인임은 분명하다. 조사자료에는 자신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에 14세로 참가하여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며, 작사자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하였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滯美 中에는 안창호작이라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들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기 직후 미국과 하와이에서는 신한민보 등에서 애국가 또는 ‘국민가’(동일 가사)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에 가치를 둔다면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5. 윤치호 작사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교육자·정치가·저술가·개신교 운동가·계몽 운동가·언론인·독립협회·만민공동회·신민회·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한 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 의회설립운동을 벌이고, 황제에게 불충(不忠)하는 역적으로 취급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제경찰의 미행과 내사 등을 견디지 못해 친일로 전향하였다. 애국가 작사 문제는 문헌과 증언과 상황이 확정에 이르는 단계이지만, 친일 프레임에 발목을 잡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작사설 항목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 개의 그룹인데, 하나는 한영서원 제자들의 증언, 둘은 가족의 주장, 셋은 지인들의 주장, 넷은 평론가 또는 제3자의 증언이다. 이제 각 측의 주장과 앞의 네 작사설을 교차검증하여 증거 자료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한다. 한영서원 제자 신영순(申永淳) 외 3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우선 ‘特別讚美歌集’ 즉, 초판 ‘찬미가’의 존재를 알려 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제1장이 국가(영민요곡), 제2장이 황실가(영민요곡)이고, 그 다음이 독립가와 신병가 등이었는데, 곡조는 찬송가 곡이었다”라고 하여 재판과는 다른 편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첫째 제1장이 국가(KOREA), 제2장이 황실가로 편제된 점, 둘째 재판 ‘찬미가’에 없는 찬송가 곡조의 ‘독립가’와 ‘신병가’가 수록된 점, 셋째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이상의 세 가지를 들어 재판과 다른 초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아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점을 보강해주기도 한다. ‘찬미가’ 초판은 1906년 10월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 첫 입학생 14명에게 배포하기 위해 소규모로 출판을 했고, 1907년 작사한 현 애국가 외 2편의 ‘애국적 찬미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포함하여 재판을 1908년 6월에 발행하였다. 이의 존재를 바로 한영서원 학생들의 체험적인 직접증언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어서 1913년 "창가를 수집하여 비밀로 노래책을 출판하였다가 투옥되고 압수를 당했는데. 제1권 제1장 ‘애국가’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 되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 창가집의 실물이 없어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책에 대한 ‘창가책사건’ 관련 기록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드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최규남의 증언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9세로 한영서원 다닐 때의 경험을 진술한 것인데, "한영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부치고 선생 朴嶼陽(강화출신)씨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며 이것은 윤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제자 김동성도 50년 전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윤치호)이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唱歌集’과 ‘讚美歌冊’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혼동을 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다른 인물들의 작사설과는 다른 전문가의 증언이 있다. 박은용과 주영환이다. 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은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愛國歌考’에서 윤치호가 1945년에 남긴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통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47년 발행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오류를 이미 7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좌익계 음악평론가의 이 질타는 친일파 척결이라는 첨예한 시점에서 시류에 따라 안창호가 민족지도자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주영환(朱榮煥)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는 기자협회보 3호에 서정주가 쓴 ‘청년 이승만’에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口傳을 받은 筆記”에 근거하여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한 사실, 둘은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에 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점, 셋은 윤치호 자손이 이광수에게 정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 번째는 앞의 안창호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증언을 상쇄시키는 것으로 의미가 큰 증언이다. 윤치호작사설에 특이한 두 인물의 주장도 있다. 백락준과 최남선으로, 백락준(白樂濬, 1895~1985)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관한 문교부 전임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증언은 서울신문에서 밝힌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자신이 윤치호로부터 직접 받은 ‘찬미가’를 통해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찬미가’를 6.25 때 분실했다고 하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찾는다는 기사를 낼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력을 지닌 자료였다. 최남선의 증언은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 증언이다. 윤치호 가족 측에서 1945년 작성한 ‘자필 가사지’의 ‘一九0七年 尹致昊 作’ 표기 문제, 철자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다. "<一九0七 尹致昊作>이 眞이라면 윤 씨 작이라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1907년 윤치호 작’이란 표기는 가사를 쓴 시점이 아니라 작사를 한 시점을 밝힌 것이기에 서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윤치호가 이른 시기에 어문법에 관심을 보인 인물임으로 역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자필 가사지’가 윤치호가 직접 쓴 진적(眞籍)이라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 최남선의 증언은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유지된 기조이다. 첨언한다면 최남선은 조사자료 ‘애국가의 종류’에서 ‘대한제국애국가’와 현 애국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 전문가적인 소견을 피력한 인물이다. 윤치호작사설 주장의 의미 있는 그룹은 윤치호 가족들이다. 사위 정광현, 이복 동생 윤치왕이 그들이다.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윤치호의 셋째 사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기간 두 번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한 가족 일원이다. 조사자료에는 ‘찬미가’ 재판의 존재를 제시하고, 1945년 작성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佐翁 筆跡의 애국가는 1945년 作故하기 전에 가족들의 請으로 讚美歌集에서 베낀 것이다. 謄寫할 때 綴字法도 多少 고치고 또한 ‘임금을 섬기며’의 句는 이미 改作한 것이라 하야 現 歌詞로 고쳐 썼다.” 윤치호 작사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증거력이 큰 사료인 ‘자필 가사지’의 작성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에 의해 기념으로 남긴 것이란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중 "님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이유에 대해 가족들이 바뀐 부분 대로 쓸 것을 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서 <찬미가> 제14장과 차이나는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윤치왕은 1907년 "애국가 ‘백두산이’(영국민요)를 지어 학교에서 부르고 소책자로 박어서 분배”했다고 ‘찬미가’의 존재를 증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5인에 대한 작사설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조사자료는 1955년 4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로 촉발되어 5월 13일 자료집을 발간하고 조사가 시작되어 1956년 8월 31일 최종회의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는데 활용하였다. ②작사자로 거론된 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인이며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이 있었다. ③주요 내용은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 부록, 참고문헌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각 작사설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민영환 설은 1902년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 작곡 ‘대한제국애국가’ 악보집 서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에 대한 오해로 비롯되었다. 최병헌 설은 ‘불변가’라는 시에서 남산을 본 감상을 더해 작사했다고 하나 이 원작은 확인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제기한 설일 뿐이다. 음악가 김인식의 작사설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3,4절에 자신이 지은 1, 2절을 구성해 1910년 발표한 ‘愛國歌’(KOREA)를 오해한 제자들 유포한 설에이를 철회하지 못한 본인이 주장한 설이다. 안창호 설은 이광수가 지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왔을 때 안창호가 지은 현 애국가를 보여주고 양해를 받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양해를 얻었다는 시점이 이미 윤치호가 작사하여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간한 이후여서 시점이 문제가 된다.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3개월 전이 1908년 6월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소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사의 탈맥락상과 연동이 되는 것으로 안창호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역시 대성학교 학생들과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설인 것이다. 윤치호 설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만으로도 작사 사실을 확정할만하다. 홍색 표지의 초판과 재판 역술 ‘찬미가’가 제시되었고, 1945년 작성된 ‘자필 가사지’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한영서원 제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있고, 가족들의 확신으로 자료가 제시된으로서 작사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거론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활을 하여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한 두 가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진실을 주장하기에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증거자료와 증언의 부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는 거의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6개월간의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회의는 이 자료집에서 제시한 윤치호 관련 자료와 증언의 교차검증 과정이기도 하였다.(물론 조사과정에서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치호 작’ 자료 등 확인) 이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윤치호 작사 사실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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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광대' 문진수가 아시아 1인극제 합류하다'아시아1인극협회'가 주최하고 '아시아1인극제·거창 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아시아1인극제는 1988년 고(故) 심우성 선생의 선언으로 서울에서 시작됐으며, 2007년부터 거창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해 전통연희를 전공하는 문진수 아티스트가 전통(춤사위. 재담, 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서 국내외 참가자들과 국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아시아1인극제는 전통을 현대적 퍼포먼스로 작업하는 아시아 지역 솔로 퍼포머들의 축제로 3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4개국 25명의 공연자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난리버꾸통’을 펼쳤다. 주최측은 "아시아의 전통예술은 어느 나라나 생존 위기에 놓여있다. 1인 공연분야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지만 세상을 비추는 불빛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겠다"고 전했다. 모집분야는 전통예술 장르를 모티브로 한 1인 퍼포먼스 작품으로 전통연희, 춤, 음악, 연극, 마임, 오브제 인형극, 서커스, 마술, 저글링, 복합장르 등 다양한 분야이다. 실내와 야외에서 공연할 수 있는 작품이면 신청 가능하다. 출품 작품 공연시간은 20분 이내이다. 국악신문 기미양 객원기자가 '아시아1인극제'를 앞두고 지난해 많은 전승활동을 보여준 1인극 뫼비우스를 발표한 문진수 아티스트를 인터뷰 했다. 국내 전통예술 평론가 남정숙, 조춘영, 정형호 민속학자에 이어서 세계적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에까지 러브콜을 받고 있는 문진수의 매력은 어디까지일까? Q. 안녕하세요. 문진수 선생님 작품은 무대에서 매년 보고 있습니다. 아시아 1인극제 참여(합류)하게 된 계기는 A.제가 아시아 1인극제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현재 아시아 1인극제 예술감독을 맡고 계신 마임의 대가 유진규 선생님의 추천으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2022년 민속학자 故 심우성 선생님의 아드님 심하용 한국민속극박물관 관장님께서 공주 아시아 1인극제를 대신할 '공주돌모루예인축제'를 만드셨고, 그곳에서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명성과 작품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직접 뵙고 인사드릴 수 있어 영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Q.유진규 선생은 언제 처음 만나셨는지요. A.그런데 공교롭게도 선생님을 뵌 건은 2004년 공주 아시아 1인극제 였습니다. 거창 아시아 1인극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공주 아시아 1인극제'에 같은 장소에서 제가 공연을 했었는데, 아마도 유진규 선생님께서는 저의 존재나 함께 출연한 것도 모르실 수 있습니다. 이후 20여년 만에 '공주돌모루예인축제'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유진규 선생의 추천으로 1인극제위원회에 합류하게 되어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아시아 1인극제 운영위원(연희)으로 추천해 주셨고 미력하나마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Q.작년 아시아 1인극제 내놓은 작품은 A.'뫼비우스'라는 작품입니다. 부 제목은 '흑사 위에 백사'이고 천의무봉 중에서 12발을 내세워서원을 형상화 했습니다. 거기에 재담에 얹어서 시대의 목소리를 표출하는 공연입니다. Q.전통 연희가 아닌 새로운 모더니즘이라는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의 목소리를 1인극에 담아내는 작픔을 마치고 어떤 영감을 받으셨는지요 A.공연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유진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저에게는 큰 화두가 되었습니다. "얘는 광대인데 그냥 광대가 아니야! 아름다운 광대야” 선생님의 말씀처럼 아름다운 광대가 되기 위하여 늘 정진하고 노력하며 정신과 육체를 가치 있게 다듬고자 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광대로 살고 싶습니다. Q.뫼비우스. 흑사 위에 백사' 시놉시스는, 배경음악, 연출, 안무는? A.우리는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양극화 되면서, 피지배자는 지배자의 억압과 횡포에 저항하면서 이 세상을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검은 세력과 요괴들의 검은 마법에 어지럽혀진 인간 세상에서 구원과 평화를 기원하는 작품입니다. 배경음악은 남사당 대전지회에서 협연해주셨고, 연출, 안무는 제가 맡았습니다. Q. 오늘날 흑사를 상징하는 부류는? A. 인간세상을 쥐락 펴락하는 사회 특권층 목사, 박사(지식꾼), 변호사, 판사, 검사, 정치가 등을 통털어 지칭합니다 Q.'뫼비우스' 작품 주제는 A.지배자 권력의 억압과 횡포에 맞선 피지배자의 '저항정신'을 시대비판 의식으로 담아냈습니다. Q. 주제를 상징하는 구체적 행위는 A. 흑사에 대항하는 백사가 돌리는 상모의 큰 원은 공생과 화합을 상징합니다. 주제의식을 원으로 상징했습니다. Q.줄거리는 A. 인간과 요괴가 공존하는 어지럽고 혼탁한 요지경 세상. 악의 흑주술을 따르는 검은 세력은 요괴들과 야합하여 세상을 온통 흑마법으로 물들이고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고 뒤흔들며 설상가상 검여사까지 등장하여 검은 세력들은 한층 더 득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힘을 모아 검은 세력과 요괴를 물리치려 시도하지만, 이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세상을 오히려 악으로 물들인다.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무고한 자기편 사람들을 잡아들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듭니다. 소위 말하는 내전이 일어난거죠. 이후 검은 세력의 막강한 힘과 권력 앞에 무너지고 마는 인간 세상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제의를 지내게 된다. 소망에 답하듯 혼탁한 검은 무리 흑사에 대결하는 백사(12발 상모)가 출현하고 협객 금복주의 활약과 희생으로 세상은 평화를 되찾게 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과 12달 축원 덕담, 숭고한 희생에 대한 '비나리'의 의미를 담은 춤과 마지막 신명을 다해 '12발 상모' 연희를 보여주면서 대단원을 올리고 막을 내렸습니다. Q.전통연희 중 어떤 제재를 선택해서 표현하셨나요 A. 검은 세력 흑사를 상징하는 검은 색 의상, 백사를 상징하는 12발 상모입니다. 거기에 극적 스토리텔링 바탕위에 펼져지는 재담, 12발 상모연희, 춤사위로 풀어낸 1인 연희극 작품입니다. Q.기획 의도는 A.‘문진수류 열두발 상모춤 1인 연희극, 뫼비우스(검사 위에 백사)’는 열두발 연희에 새로운 창작과 시대적 이야기를 더해 선보이는 1인 연희극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기존 풍물판에서 12발 상모가 보여주는 부속 연희로서의 한정된 기예와 제약에서 벗어나 미학적인 가치와 몸짓의 예술성과 함께 검은 세력(검은색 의상)과 그에 저항하는 백사(12발 상모)의 대립, 극적 갈등의 해결, 염원과 제(祭)를 통해 시대의 정신을 담아 표현하고자 하였다. 전통민속 예술(연희)의 전통성과 시대의 목소리를 '재담'이라는 전통연희 장르를 조합하여 현대적 해석을 모색했습니다. Q.작품 목적은 A. 첫째, 시대에 맞서는 민중정신, 인간 삶의 애환을 해학과 풍자로 풀어내며 평안을 기원하는 민중공동체의 가치를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둘째, 전통의 '현대적 해석', 즉 전통연희극 창조작업을 통해 전통의 확장을 모색했습니다. '춤사위/재담/소리'의 조합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셋째, 벽사진경(辟邪進慶)을 추구하는 제의적 행위 '굿'을 통해 전통예술이 구현하는 공동체의 조화와 공생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Q.작품의 완성을 위해 어떤 점에 노력했나 A.전통 12발 상모 연희를 재창조하며, 전통 연희와 풍물굿의 고사 소리 등에서 구전되어 온 재담들을 해석한 바탕 위에 사회적 가치, 시대에 대한 해학과 풍자를 재담에 담아 연희극을 재창작하였고, 12발 상모 연희와 함께 유려한 춤을 추면서 재담을 해야하기에 숨이 차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끝까지 완주했다. 머리에 상모를 쓰고 재담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춤과 연희를 보여주며, 또한 고난도 연희의 끝에연달아 재담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짧게는 35분. 길게는 2시간도 할 수 있는 저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평소 체력 증진에도 힘썼습니다. Q.극적 요소는 A. 인간 세상을 혼란시키는 검은 세력과 백사의 대결구조, 12발 상모를 검은 세력에 대항하는 주체로, 재담 행위는 저항하는 민중의 주체로 대비시켰다. 즉, 12발 상모 연희와 춤사위, 재담 행위는 각각의 주체로서, 극적인 대립과 갈등 구조를 표출하는 연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Q. '1인극'으로 보여준 전통연희 작품을 관객들은 어떻게 해석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연희자의 시선에서, 다시 말하면 무대에서 바라보는 관객들과의 교감은 주고 받았나요. 특히 외국에서 온 아티스트로 출연한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A. 관객들이 충분히 이해를 하고 보신 것 같습니다. 백사의 출현(전개)과 갈등(클라이막스) 해결(대단원)이라는 드라마틱한 극적 과정이 넘어갈 때마다 관객은 알아채고 추임새와 박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작품 속에서 재담과 춤, 연희를 통해 서사의 매듭을 매고 달고 풀어내며, 외국아티스트들과 춤과 연희라는 '몸의 언어'만으로도 충분한 감흥과 신명을 주고 받았습니다. 지난 해 줄판,살판 등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광대 문진수 아티스트는 전통과 현대의 충돌, 억압에 맞선 '저항'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뫼비우스'작품을 발표했다. 전통연희를 현대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장르로 탄생시켰다. 세계를 향해 12발 상모를 내걸고 현대적 아티스트로 새로이 태어났다. 전통과 모더니즘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광대로.... 전문가 평에 의하면 품격있는 가무악에 능한 문진수의 멋들어진 유려한 춤사위, 재치 넘치는 재담, 화려한 12발 상모 기예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전한다. 어느새 관객들은 연희꾼 문진수의 스토리텔링을 따라 검은 세력의 횡포에 함께 분노하며, 인간 세상의 갈등과 대결을 마치고 조화(구원)를 기원하게 되는 과정에 공감했다고 전한다. 올해 아시아1인극제 1차 모집에 한국 작가 80여 명이 경연에 참가했다고 한다. 유진규 심사위원장에 의하면 "예술계 각 분야 전문 심사위원 8분이 개개인 기예능과 이력, 작품목적과 주제 등을 채점하여 그 중 12개 작품을 선정해서 세계인들과 같이 6월 20일부터 5일간 거창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고 전한다. 전통작품을 근간으로 한 어느 장르 작품이 나올지가 궁금해진다. 운영위원 문진수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발표는 다음주 2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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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지휘자 이든 "지휘봉 들면 성악가도 되고 연주자도 되죠"오페라는 클래식 공연 가운데서도 성악, 관현악, 연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종합예술로 꼽힌다. 막이 오르면 공연을 진두지휘하는 건 무대 아래 깊이 파인 공간인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지휘봉을 든 지휘자다. 객석에서는 뒤통수만 빼꼼히 보이는 오페라 지휘자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를 누비는 성악가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을 순간순간 상황에 맞춰 촘촘하게 조율해야 한다. 일찍이 '오페라 지휘자'로 커리어를 굳힌 이든(36)은 이런 오페라 지휘 체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N스튜디오에서 만난 이든은 "감사하게도 제 지휘가 편하다고들 해주신다"며 웃었다. 이든은 오는 22∼25일 국립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하는 로시니의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으로 국내 전막 오페라 데뷔 무대를 치른다. 021년 프랑스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며 이름을 알린 이든은 지휘에 앞서 성악과 피아노를 전공했다. 중학교 진학 시기에 "음악을 하고 싶다"며 훌쩍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면서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했고, 2012년 미국으로 건너가 매네스 음대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테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도 가졌지만, 음악가로서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종착지는 지휘자였다고 했다. 미국에서 유스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지휘자로 발을 내디뎠고, 다시 베르디 음악원으로 돌아가 지휘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든은 "성악가가 되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슬럼프가 왔고 '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때 지휘를 제대로 공부했는데, 공부할 게 너무 많은데도 마냥 좋았다"고 회상했다. 지금까지 15개 안팎의 오페라 전막을 지휘한 이든은 지난해에는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역량을 증명했다. 오페라를 지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지휘를 지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소프라노가 노래할 때는 저도 소프라노가 된 것 같고, 합창할 때는 합창단 단원이 된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는 그 악기 중 하나가 된 것 같고요. 매일매일 같은 작품을 해도 흥미롭고,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든은 오페라 지휘자로서 자신의 강점이 뭐냐는 질문엔 "과거 무대 위에 섰던 사람으로서 성악가들이 어떤 고충을 겪는지 안다"고 답했다. 그는 "공연마다 성악가의 호흡과 프레이징(음악의 흐름을 유기적인 의미나 내용을 갖는 악구로 구분하는 일)이 다르다"라며 "이런 부분을 공연 때 바로바로 캐치하고 지휘에 반영하다 보니 제 지휘가 편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며 쑥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페라에서 성악가들은 연기를 하면서 노래하다 보니 리허설 때와는 달리 실제 무대에서 호흡이 딸리거나 프레이징이 짧아질 때가 있다. 반대로 공연 날 컨디션이 좋아 고음을 더 오래 끌 때도 있다. 이런 현장 상황을 무시하고 미리 계산해 놓은 대로 지휘하면 '노래 따로, 오케스트라 따로'가 된다는 것이다. "간혹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가 맞지 않는 공연이 있어요. 예를 들면 무대에서 성악가가 턴을 다 못했는데 '이 부분은 5초로 연습했어'라며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 버리는 식이죠. 그래서 공연 때는 오케스트라도 성악가도 서로 편의를 봐줘야 해요. 이걸 조율하는 게 지휘자고요." 지휘자라고 하면 백발의 나이 지긋한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클래식계에서 이든은 30대 지휘자로도 주목받는다. 평생 공부하는 삶을 살아가는 음악가로서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스승인 핀란드의 거장 지휘자 요르마 파눌라를 찾아가 점검받는다. 이든은 나이에 대한 생각을 묻자 "30대 중반을 젊은 지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나이가 많다고 경험이 많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경력이 많은)분들보다 뭘 더 해야 할지 생각하면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일궈나가야 해요. 그만큼 더 많이 공부하고 있어요." 포디움에 설 때면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이든이 향해가고 있는 지휘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흉내 내지 않는 지휘자"라고 답했다. "남을 따라 하는 지휘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젊은 지휘자 중에서는 종종 누군가의 지휘를 흉내 내는 경우가 있어요. 또래 지휘자들끼리 모이면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너 그 선생님처럼 하더라?', '오늘은 (전설적인 지휘자) 아바도?'라면서요. 그러면서 고쳐나가기도 하죠. 저만의 지휘를 하고 싶어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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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스타 40여명 어깨 맞댄 '위 아 더 월드'는 어떻게 탄생했나"자존심은 문 앞에 두고 오세요."(Check your ego at the door) 1985년 1월 28일 밤. 석 줄짜리 문구를 휘갈긴 흰 종이가 로스앤젤레스 A&M 스튜디오 대문에 붙었다. 그리고 하나둘 도착하는 전설의 스타들. 스티비 원더, 브루스 스프링스틴, 다이애나 로스, 밥 딜런, 신디 로퍼, 빌리 조엘, 레이 찰스…. 부랴부랴 모여든 40여명의 팝스타는 어깨를 맞대고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자존심을 내건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룻밤, 팝 역사상 다시 없을 꿈만 같은 밤이다. 자선 곡 '위 아 더 월드'의 탄생 배경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The Greatest Night in Pop)이 국내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있다. 감독 바오 응우옌은 프로젝트를 기획한 주역들의 음성을 통해 흥분과 긴장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감독의 의도가 통했는지 이 다큐는 역사적인 녹음 현장을 담아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로도 통한다. 영화는 글로벌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 98%(만점 100%)를 기록하고 있으며, 넷플릭스 공개 이후 곡 '위 아 더 월드'가 빌보드 디지털 송 세일즈 차트 21위에 오르는 진기록도 나왔다. 작품은 1984년 12월 라이오넬 리치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다. 매니저 켄 크레이건은 라이오넬에게 인권운동의 선봉 해리 벨라폰테와 함께 아프리카 기아들을 구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백인은 흑인을 돕는데, 흑인은 흑인을 돕지 않는다"는 게 해리의 불평이었다. 켄의 구상은 이랬다. 밥 겔도프가 결성한 영국 자선 밴드 에이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되, 미국의 슈퍼스타를 끌어들이자는 것. 가요계 마당발인 라이오넬이 나서자 섭외는 일사천리. 마이클 잭슨이 선뜻 라이오넬과 작곡에 나서고,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스티비 원더, 밥 딜런, 케니 로긴스 등이 잇따라 합류한다. 녹음일은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시상식 당일로 정해진다. 팝스타 수십명을 한데 모으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이유에서다. 마감이 갑작스럽게 앞당겨지면서 발등에 불이 붙은 라이오넬과 마이클은 정신없이 곡을 써낸다. 이 모든 일이 고작 한 달 사이에 벌어진다. 작품의 백미는 거사 당일을 담은 메이킹 필름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A&M 스튜디오에 모여든 스타들의 면면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현장에 있던 폴 사이먼의 한 마디로 짐작할 수 있다. "여기 폭탄이 떨어지면 존 덴버(70년대를 풍미한 포크 가수)가 다시 정상을 차지하겠네요." 그러나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콧대 높은 스타들을 욱여넣은 좁은 스튜디오에는 탐색과 견제, 그리고 서로에 대한 동경이 뒤얽혀 미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카메라에 차례차례 나타나는 스타들의 어색한 표정은 작품의 또 다른 볼거리다. 라이오넬 리치는 그들의 첫 만남이 "유치원에 처음 간 날" 같았고, "퀸시 존스가 이 유치원생들을 통제해야 했다"고 회상한다. 그중에서도 잔뜩 움츠린 채 입술을 달싹이는 거장 밥 딜런의 갈 곳 잃은 눈동자는 그야말로 진귀한 광경이다. 이어지는 녹음 과정도 눈을 떼기 힘들다. 5천와트짜리 조명의 뜨거운 열기에 찜통이 돼버린 스튜디오에는 점차 짜증 섞인 불만들과 하품 소리가 늘어간다. 그 와중에 곡에 스와힐리어를 집어넣자는 스티비 원더의 제안에 스타들은 당황하고, 웨일런 제닝스는 '스와힐리어는 쥐뿔도 모른다'며 자리를 떠버리기까지 한다. 이후에도 혼란과 고비는 반복되지만, 그들도 결국은 누군가의 팬이었다. 다이애나 로스가 대릴 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악보에 사인을 요청하자 녹음실은 순식간에 공동 사인회 현장으로 변모한다. 어찌어찌 녹음이 끝난 뒤, 로스는 끝내 울먹이고 만다.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면서. 그해 3월 발매된 '위 아 더 월드'는 빌보드 싱글 차트 '핫 100'에서 4주간 1위에 올랐고, 그래미 어워즈 '올해의 노래상'을 받았다. 어쩌면 다시 없을 위대한 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기록이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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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테노레' 창작진 "꿈을 이루려면 짊어져야 하는 무게 그렸죠""1930년대 경성의 의대생이 완전히 낯선 세상인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선 감정과 짜릿함, 심지어 괴상함까지 표현하고 싶었어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모범생 윤이선이 우연히 듣게 된 오페라 음악의 선율에 온 마음을 빼앗긴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태리 창극'에 묘한 끌림을 느끼던 그는 이윽고 오페라에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지난해 12월 개막한 뮤지컬 '일 테노레'는 진정한 꿈을 발견한 청춘의 설렘과 변화를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일 테노레'의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는 15일 연합뉴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소극적인 의대생이었던 주인공 이선이 한국 최초의 오페라 테너로 성장하는 과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다"며 "이선이 오페라와 사랑에 빠지는 동안 느끼는 감정을 현실적이고 순수하게 담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일 테노레'는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의사이자 한국 최초 오페라 전막 공연을 선보였던 실존 인물 이인선의 삶에서 영감을 얻었다. 극중 인물인 윤이선은 항일운동단체 학생들과 조선 최초의 오페라 '꿈꾸는 자들'을 준비하며 꿈을 키워나간다. 작품은 어리숙한 모습의 이선과 학생들이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며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따라간다. 박 작가와 애런슨 작곡가는 음악적으로 이선이 변화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초반부와 후반부 넘버에 명확한 차이를 뒀다. 두 사람은 "초반에 이선이 의대생으로 부르는 넘버에서는 지나친 고음이나 큰 성량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며 "극 후반부 이선이 테너의 꿈에 가까워질수록 넘버도 격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작품 속 가상의 오페라에 사용되는 노래들은 실제 오페라 스타일로 작곡해 설득력을 높였다. 대학 시절 클래식을 전공한 애런슨 작곡가는 19세기 오페라 스타일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뮤지컬에 어울리는 감정과 분위기를 지닌 노래를 만들었다. 애런슨은 "실제 오페라라고 가정하고 좋은 오페라 곡들을 작곡하려 애썼다"며 "19세기 오페라에 사용된 요소인 라이트모티프(반복해 사용되는 짧은 주제)도 활용했다. 또한 오페라 곡들의 멜로디가 다른 곡에서도 반복되며 극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성을 지니도록 의도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전달하려 꿈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강조했다. 작품은 오페라를 향한 이선의 꿈과 조국 독립을 향한 학생들의 꿈이 부딪히는 순간을 극적으로 부각한다. 박 작가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기에 생기는, 온전히 혼자 짊어져야 하는 '꿈의 무게'를 그리고 싶었다"며 "저와 윌은 무사히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에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생기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비극을 동시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애런슨 작곡가는 "'일 테노레'는 1930년대가 아니라 어떤 시대를 살더라도 마주하게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며 "저희 두 사람도 뮤지컬 속 인물들처럼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꿈을 세상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하던 시기에 작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2012년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처음 작가와 작곡가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2018년부터 작품을 개발해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일 테노레'는 이들에게도 큰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라고 한다. 박 작가는 "'일 테노레'는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며 "앙상블들이 공연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넘버를 보면서 많은 뭉클함을 느낀다. 특히 개발 과정에 처음부터 참여해준 배우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 작가는 작품을 준비하며 이선에게서 발견한 매력을 관객들도 만나게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연습실과 무대에서 이선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선의 순수함, 열정,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일 테노레'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이달 25일까지 계속된다. (연합뉴스)